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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4일 수요일

가타리 읽기 세미나.


추첨제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분이 말했다. 가위바위보로 국회의원을 선출하자고. 그러자 다른 분이 농담을 던졌다. 가위바위보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겠네요.

정당정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기 있는 유명인을 영입하는 조직의 기획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런 것을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거시정치에 대한 기대와 환멸은 모두 우리 내면에 각인된 국가주의가 만들어낸 것 같다. 구조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전에 관계망을 갖추는 편이 낫겠다. 우애와 연대로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지. 그래봐야 한 걸음이지만 모두가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아마도 진보일테지.

이진경 선생님의 노마디즘을 꽤 여러 번 들춰 보았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 듯. 현명한 해설자의 독백을 읽는 것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편이 낫구나. 초원의 여기저기에서 이 도시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들은 성벽의 붕괴를 예언하거나 도시민을 위협하거나 가두어진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내면의 뜨거움을 널리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음악과 예술은 언제나 이런 목소리를 통해 퍼져나갔다.


2013년 5월 3일 금요일

얼굴성과 예술.

-되기 위해서 얼굴을 해체하기 위해서...
"여기에는 예술, 최고 예술의 모든 자원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글의 모든 선, 회화성의 모든 선, 음악성의 모든 선 등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글을 통해서이고,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색에 의해서이고, 냉혹하고 기억이 없게 되는 동시에 동물이 되고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 즉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음악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목적(fin)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예술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닌 이 모든 실재적 생성들, 예술 안으로 도주하는 것, 예술 안으로 피신하는 것에 있지 않은 이 모든 능동적인 도주들, 예술 위에서 재영토화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탈기표작용적인 것, 탈주체적인 것, 얼굴-없음의 영역 쪽으로 데려갈 이 긍정적인 탈영토화들인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 pp. 356-357.)



얼굴은 백색인이 설정한 그리스도의 얼굴이에요. 권력의 배치물이 형성될 때 필요한 수단, 가장 표면적인 것, 타자와의 차이를 결정하는 기준이에요. 꼭 인종주의에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백인의 흰 얼굴이 다른 인종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이해하면 직관적일 것 같아요. 얼굴성은 기호계의 외부를 배제하고 이질적인 표현들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라 유목적인 기계나 원시적인 다양성이 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 것이고요.


인용한 구절은 얼굴을 해체하고 리좀적 특질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술자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예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리는 유미주의적 관점, 예술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런 느낌은 아닌 듯, 들뢰즈의 다른 저작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프란시스베이컨의 회화에서 얼굴성이 해체되는 것과 같이, 재현적이고 현실반영적인 예술이아니라 난폭한 감각 같은 것이요. 결국 책 꺼내서 인용하자면 얼굴성에서 해방된 특질들이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에서 해방된 특질들과 함께 리좀을 만든다고 해요. 얼굴성이 정치인 것과 같은 이유로 얼굴의 해체도 정치의 문제고요.

욕망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억제하는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 모든 사물을 얼굴로 보는 것이 결국 페티시즘, 얼굴은 추상긱계, 인식이 부여하는 고정관념이 생산되는 방식. 의미를 생성, 주체회의 문제가 되는 이유, 이런 안면성이 기표적 안면성이라면, 도표적 안면성은 주변을 변화시키고 획일적인 배치를 변화시키는 행위. 안면성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 도표적 요소를 추가해서 책임주체를 해체하자는 것. 자본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기표적 얼굴성-주체성을 강요하지만, 얼굴 없는 개인들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리좀적 특질에 가까움.


2013년 3월 30일 토요일

바그너와 영토적 모티프.

1.
바그너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고 주장했을 정도의 꼴통 반유대주의자였는데,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이렇게 혁신적인지! 꽤 많은 경우에 예술가의 꼴통짓과 예술적 성취에는 별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김원철 '꼴통'이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였다고 봅니다. 반유대주의를 이용해 먹었을 뿐이라는 얘기죠.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음악 이야기: 바그너 색깔론 ― 이택광 떡밥

이택광의 글에서 인용 "정치를 떠난 예술은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예술행위는 정치적이다. 심지어 순수예술조차도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그너의 예술은 그의 반유태주의와 무관할 수가 없다. 마치 친일문학이 그러하듯.
문제는 바그너를 이스라엘에서 연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음악에 스며 있는 그 정치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2.
드뷔시의 <대낮에도 꿈을 꾼다>는 내가 처음으로 샀던 클래식 음반이다. 커버가 연한 하늘색에 재미있는 일러스트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당시 유행했던 브릿팝인 줄 알고 덥썩 집었다. 클래식 음반은 노란 딱지에 검정색 명조체로 작품명과 지휘자의 이름이 새겨진 딱딱한 디자인일 거라는 편견에 속았던 게다. 그때 드뷔시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잠이 많을 때였으니 아마 꿈이나 꿨겠지.

얼마전 경기필 연주로 드뷔시의 <바다>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함께 갔던 영진쌤이 어떠냐고 물으시길래 그림 같다고 답했는데, 실제로 이 작품이 우끼요에 파도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가 미술에서 아이코놀로지와 같이 해석되는 것이라면, 소리가 그림을 그려서 모티프가 일종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바그너와 드뷔시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원철님께 여쭤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드뷔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여명으로 오해받은 황혼이다." 아따~ 패기 돋네, 너님이 짱 드셈.

 모던한-_-; 아티스트 드뷔시에 대해서는 원철님의 글 참고.
 http://wagnerianwk.blogspot.kr/2009/07/현대음악의-모더니티-아래-글에-이어.html

김원철 드뷔시가 발전론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를 빼고 나면, 바그너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옛날에 서양음악사였던가, 조교를 했었는데, 교수님이 저한테 '곡 제목 맞히기 듣기 평가' 문제를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중에서 중간에 나름 멋있는(?) 대목을 따다가 학생들한테 들려 줬더니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이라고 써낸 사람이 제법 많았죠. (사실은 그걸 노렸… ^^)


3.
지금 발키리가 날아 오르는데 아름다운 움직임과 속도감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김원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륀힐데의 섹시한 자태를 감상하시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bRj9f3PCe0M
제가 아는 어떤 분이 평하시기를, 조운 서덜랜드와 함께 오페라계의 양대 마징가(…)

4.
그림 같은 음악을 만들어낸 바그너와 드뷔시를 언급하면서, 또한 음악적인 그림을 그렸던 화가 클레의 회색 점과 카오스를 인용하는, 들뢰즈&가타리 커플을 생각하니 애증이 돋는다.

바그너식 모티프에 대해 들뢰즈&가타리가 쓴 내용 인용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다수의 모티프들과 연관성을 갖게 되면 각각의 모티프는 자신에게 고유한 판을 획득하며, 드라마의 줄거리, 충동이나 상황으로부터의 자율성도 커져간다. 또 인물이나 풍경으로부터도 점점 더 독립하게 되어 자체적으로 선율적 풍경이나 리듬적 인물이 되며, 모티프는 상호간의 내적관계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한다."
 반복되는 선율은 변화를 위한 것, 생명력을 드러내는 소리들, 리토르넬로.

5.
미술에 대한 비유는 대충 알겠다. 음악에 대한 비유도 공부해보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생물학은........ 생물학은........ ㅠㅠ

웍스킬과 로렌초라는 이름을 가진 생물학자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 <천 개의 고원> 11번째 고원인 리토르넬로에 대해 읽고 있다.

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알.

가타리가 쓴 글을 읽다 보면 가끔 프로이트 사기꾼, 라깡 거짓말쟁이,를 외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혼자 있을 때는 충동을 따른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텅 빈 공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좋겠다. 그것을 결핍이라고 규정하고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결여, 향유(jouissance), 승화(sublimation)는 결코 이정표가 될 수 없는 말들이다. 상상계와 상징계를 가로지르는 무의식의 늪지는 너무나 어둡고 질퍽거려서, 우리들은 지쳐 쓰러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 고립되고 만다.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결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빈 구멍에 먼지와 거품과 돌조각을 채워넣기 위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환상속에서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로, 과거로, 과거로, 고통스러운 퇴행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과연 '인간(L'homme)은 알 껍질이 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 오믈렛(L'hommelette)'일까? 하지만 인간을 알에 비유하기 전에 먼저 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알을 밖에서 깨뜨리면 오믈렛이 되지만, 안에서 깨면 생명이 시작된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해서 쉽게 상처입고 부서진다. 사실이다. 그러나 알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맨몸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고정관념을 깰 수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으며, 고른판 위에서 상상하고 교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가타리를 읽으면서 깨닿는다.

대안적인 막장 드라마.

가족드라마의 전형적인 이야기구조는 어떤 방식으로든 갈등이 해소되고 상처를 봉합한 뒤 가족의 안정감을 입증하며 끝난다는 이야기를, 지난 세미나 시간에 했었다. 화해의 대결론이라니,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모든 문제와 갈등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고, 그 상태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정말 막장인) 대안 드라마는 없을까? 하는 이야기도 농담처럼 주고 받았다.

이후로 며칠 동안 결국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고 끝나는 가족드라마가 있었던가 생각해봤다. 그레고리 잠자가 어느날 아침 벌레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에서도 결국 가족들은 죽은 벌레를 내다버리고 어떻게든 희망차게 살아가기로 했다. 여동생은 일자리를 찾았고 아버지도 재취업을 했다지 아마... 이런, 카프가 너 마저...

굳이 찾아보자면 홍상수의 작품이 대안적인 막장 드라마 카테고리에 해당할 수 있을까?

가타리 읽기 세미나.

격주 화요일, 가타리 읽기 세미나에 나가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이야기를 막 하는데도 우리가 어떤 대안과 대답을 얻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거야 말로 고른판이 아닌가, 레알 리좀이다.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신승철선생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딴소리 하기 대왕은 역시 나라고 생각하는데 가상현실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하츠네미쿠-_-; 드립;; 지난번엔 코미디빅리그 이야기도 했었지;; 뭔가 생각이 나버리면 말하지 않고 참을 수가 없는데 여기선 막 얘기해도 괜찮아서 좋다. 신승철선생님이 지도해주신다면 철학과 대학원 가보아도 괜찮겠다. 물론 학위청구 논문을 쓸 자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튼 ㅡ 공부란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구나. 공부를 하니까 외롭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다. 이렇게 위대한 철학자들이 나를 위해 남겨준 글이 아직도 어마어마 많이 남아있는데 배워야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느낀다. 얼마나 충만한지 앞으로 일주일은 섹스도 딸딸이도 필요 없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