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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1일 목요일

설운 서른

시집 제목은 <설운 서른> 출판사 이름은 "버티고"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2005년에 출간된 책이다. 세로활자 편집은 읽기 너무나 괴로웠다.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는 시선의 진행방향이 익숙하니 시가 뒤부터 눈에 들어왔고 줄 사이 간격도 편안하게 들어오지 않아 이 행 저 행을 헤매기 일쑤였다. 서른 즈음에 나이를 먹어가는 시인들이 내뱉은 말들이라 더욱 읽기 괴로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승자의 <삼십 세>나 나희덕의 <나 서른이 되면> 같은 시가 실린 것은 당연하겠지. 김기택의 <사무원> 이나 김종길의 <성탄제> 같은 작품이 이 또래의 사회적 역할과 애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납득할만한 구성이다. 그러나 이형기의 <낙화>는 아직 너무 이르지 않나, 너무 비극적이잖아. 그래도 공명을 일으키는 시가 여러 편 있었다.

여림의 <실업> 마지막 행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이성복의 <세월에 대하여>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김경진의 <서른 살>

맥주를 마시다가 꾹꾹 누르며 참았던
오줌을 싸러 화장실에 가면
변기 속으로 내 서른 살이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본다
알코올만 걸러내고
고스란히 물을 쏟아내면서
오자와 탈자 투성이인 내 서른 장의
이력서를 펼친다 마음이 아프다
취한 내가 변기 속에서 거시기를
부릅뜬 눈으로 보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무겁고 씁쓸한 나이 서른,
견딜 만큼은 견뎌야지
삶이란 걸 공짜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변기의 물을 내리면
스무 살의 아련함이 쓸려간다

2013년 4월 9일 화요일

김언희의 시.

마그나 카르타
- 선언하면서 동시에 절규할 수 있다면

아침부터 썩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소
껌껌한 콘크리트 방주를 타고 밤마다 대홍수의 꿈을 꿀 권리가 있소
머리 위로 똥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꿈을 밤마다 꿀 권리가 있소
에미 애비도 몰라볼 권리가 있고 딱 오 분만 모친의 부고를 즐길 권리가 있소
파니스 안젤리쿠스를 페니스 안젤리쿠스로 번번이 고쳐 들을 권리가 있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수음을 할 권리가 있소
수음을 하면서 숨이 끊어질 권리가 있소
더 이상 미래가 궁금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젓가락 행진곡만 삼십 년을 칠 권리가 피가 나도록 칠 권리가 있소
단고기를 입에 물고 있으면서도 단고기 생각을 할 권리가 있고
착잡하게 시작해서 찜찜하게 끝을 볼 권리가 있소
소리만 철퍽대다 끝낼 권리가 있소
인생을 바꾸려 하루 오백 번 항문을 조일 권리가 있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대줄 권리가 있소
먼눈이 또 멀 권리가 있고
무엇보다 발가락으로 젓가락질을 할 권리가 있소
대공원에 비둘기가 내 정수리에 버젓이
똥을 눌 권리가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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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2011.

가끔 '여류-시인' 따위의 구태의연한 일본식 한자표현을 아직도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김언희의 시를 읽어주고 싶다. 이 시의 어디에서 댁들이 기대하는 낯간지런 내숭이 있는가 들이대고 묻고 싶다. 타협하지 않고 욕망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강렬한 시어는 섬뜩한 충격을 주는 한편으로 섬세하게 감정선을 건드린다. 이 작품은 수록된 시집에서 가장 단호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