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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2일 금요일

목수의 예술.

그는 나무로 가구를 만든다. 나무를 다루는 그의 손길은 부드럽다. 재단한 나무를 옮길 때면 어린아이를 안듯이 조심스레 끌어 안는다. 나무판을 톱으로 잘라 모양을 만들 때, 사포질을 해서 표면을 다듬을 때, 심지어 날카로운 끌로 찍어낼 때 조차도 그의 손은 다정하게 나무를 쓰다듬는다. 그는 가구를 주문하는 손님을 대할 때 보다 나무를 대할 때 더 친절하다.

가구 손잡이를 파거나 곡선의 무늬를 넣거나 홈을 파기 위해서 트리머를 사용할 때 그는 몸을 낮추고 나뭇결과 강철날이 만나는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민첩하게 팔을 뻗어 나무를 긁어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굵은 나뭇밥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강철날의 움직임이 멈춘 다. 마침내 그가 원하는 모습이 나왔는지 확인하려 톱밥을 불어내는 그의 입술에는 웃음이 담겨 있다.

나무조각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구멍을 파고 도웰핀이나 비스킷을 집어넣은 뒤 결합부위가 꼭 맞물리게 하려고 클램프로 사이를 죄어 놓을 때 그의 눈이 빛난다. 고무망치를 들고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정확한 교차점을 찾아낸다. 그가 잘라서 다듬어 놓은 나무들은 순종적이다. 그의 손가락이 움켜쥐는 대로 그가 처음 그려놓은 도면과 같은 모양을 찾아 나간다.

나무에 기름을 먹이기 위해 그의 열 손가락이 구석구석 표면을 쓰다듬는 모습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성스럽게 기름을 먹이고 잠시 기다린 뒤 얼룩이 남지 않도록 겉을 닦아 내는데 이때 기름이 마르며 피어나는 냄새는 기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가장 고운 사포를 쥐고 마무리 작업을 할 때 그는 사포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끝없이 나무표면을 어루만진다.

숲에 목수가 나타나면 나무들이 떨고 목수가 먹줄을 튕기면 나무가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나무를 지배하는 목수, 그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는 아주 천천히 일하고 꼼꼼하게 살핀다. 작업실에서 그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용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음악은 전기톱과 대패와 사포가 움직이는 모터 소리, 세상에서 가장 거친 예술이다. 그런 공연이 매일 그의 공방에서 펼쳐진다.


2013년 11월 19일 화요일

월요일 새벽의 충동.

저녁 내내 자료를 수집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오늘 찾아본 자료와는 상관 없는 원고는 뼈대만 잡아 놓았다. 내일 다시 관련 자료 모아야겠지만 대충 방향이 보이니까 수월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듯. 그리고 친구에게 전해줄 문서도 있구나 잊지 말자. 화요일에는 오랜만에 가타리 읽기 모임에 나가보고 싶다. 수요일은 곤이 전시 시작하는 날, 기왕이면 오프닝 파티에 가보고 싶은데 일정이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다. 목요일까진 빌려놓은 소설 네 권 모두 읽고 반납해야지. 금요일은 출판사에 들러서 새 작품 마감을 늦춰 놓는 데 성공하면 틀림 없이 술을 마시게 되겠구나. 토요일엔 대한문에 나가야겠다. 그렇게 일주일 지나가네... 일주일의 계획을 떠올리다가 문득 내 남자가 그리워졌다. 이런저런 일 모두 미뤄놓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 그 전 주의 일.

주말에 남자친구를 부모님께 소개시키기로 했다. 날짜만 잡고 시간 장소는 미정. 아빠도 남자친구도 내가 선택하라고 하는데 엄마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하다. 한정식집 같은 데서 밥을 먹어야 하나 아님 카페에서 간단하게 차 한 잔 마시는 편이 나을까? 분당에서 내가 아는 데라곤 술집밖에...ㅠㅠ 첫 만남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대체 결혼은 어찌 하나?

어제 부모님과 남자친구 소개를 마쳤다. 동생과 나는 깍두기;

한정식과 일식집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엔 동네의 호젓한 카페를 선택했다. 분당 율동공원 히든벨리, 내가 고딩일 때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아늑한 카페. 남자친구가 먼저 도착해서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2층 제일 구석자리를 잡아서 거의 독실 같았다.

남자친구가 정장 입은 모습이 어색했다. 정장을 입든 트레이닝복을 입든 아예 홀딱 벗든 어색했을 자리이긴 다르지 않지만.

모두가 긴장한 채 대화, 두서없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호구조사는 무사히 통과, 남자친구가 당당하게 대답해주어서 든든했다. 엄마아빠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잘 알겠고 암만 걱정해도 당장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이라 갑갑하기도 하고 그랬다.

부모님은 먼저 일어나고 나와 동생과... 남친과 셋이서 근처 이탈리아 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갔다. 남친은 임원 면접 끝나고 실무자 면접이냐며 웃었다. 동생은 남자친구를 좋게 본 것 같았다. 음식을 기다리며 동생이 말했다. 누가 보면 소개팅 시켜주고 눈치 없이 밥까지 먹으려고 따라온 주선자인 줄 알겠다. 내가 말했다. 좀 열린 사람이 보면 저 여자는 왜 따라왔냐 하겠는데. 그럴 정도로 남동생과 남자친구가 잘 어울려서 기뻤다.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와 동생과 셋이서 남자친구 이야기. 엄마는 남자친구의 경제적인 불안정을 계속 걱정했다. 동생이 쉴드를 쳐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돈 이야기는 그만 하고 딴 이야기 좀 해봐요. 엄마가 답했다. 다른 건 흠 잡을 데가 없는걸. 아, 일단은 성공인가!

2013년 10월 26일 토요일

거짓말에 대해.

나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서 어떤 가면을 써도 좋다고 내킨다면 맨 얼굴을 드러내도 좋다고 그것은 온전히 당신이 선택할 일이라고 알려주기 위함이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여드름 권리장전.

님이 나의 맨등을 쓰다듬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피지에 지나지 않았다. 님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여드름이 되었다. 

"등에 여드름 났네."
"어디?"
"여기."
"앗 따가워. 여드름 짜주세요."
"아직 덜 익었어."
"앞으로 내 등에서 여드름을 발견하면 언제든지 맘대로 짤 수 있는 권리를 줄 게요. 아무에게나 함부로 부여하지 않는 특별한 권리에요."
"특별한 일이라는 건 알겠지만 별로 행사하고 싶은 권리는 아니야."

속살에 대한 권리가 이토록 에로틱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함무라비 협정.

"자기는 내가 좋아?"
"좋아."
"같이 살고 싶을 만큼?"
"응."
"만약 나랑 같이 사는데 내가 맨날 술 먹고 돈도 안 벌어다주고 막 때리고 그러다 집 나가고 그러면 어떡하려고?"
"그럼 나도 술 먹고 돈 안 벌고 맞서 싸우고 집 나갈 거야."

그는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좋은 아내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몰라 두렵다. 그러나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한대도 존중받지 못할 때는 있지만 반대로 상대를 함부로 대한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지. 그러니 조심하는 수밖에.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뉴요커의 결혼상담.

K양: 언니 H랑 친해?
나: H를 많이 좋아하지만 친하다기는 좀 글치. 
K양: 걔 결혼하고 심도있게 얘기해본적 있어?
나: 결혼하기 전에 외국인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던 적은 있어. 
K양: 외국인이랑 사는 거 어떻대? 걔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걔랑 말해본게 억만년쯤전인듯. 
나: 김치를 못먹는대. 그외에는 딱히 외국인이라 뭐 어떻다는 생각은 안드네. 
K양: 김치야 뭐 나도 안먹고사니까. 
나: 외국인이 결혼하자고 그래?
K양: 애인이 요즘 너무 심각하게 굴어서 덜컥 겁이나네. 
나: 애인은 남자야?
K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미국인 애인은 막 레즈비언일수도 있을거같고 ㅋ
K양: 뉴욕이 게이결혼 합법이 되긴 했지만... 내가 게이타운에 살긴 하지만...
나: 애인이 남자면 한국에서도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어. 
K양: ㅋㅋㅋ 외국인하고 같이 사는데 문제는 없고?
나: 그보다도 남자랑 같이 사는 게 큰 문제 아니겠나 싶다.
K양: 내 말이. 방구도 맘대로 못 뀌고. 

2013년 9월 3일 화요일

감정의 진공상태.

좌절감이 컸다. 그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고 느꼈다. 전력을 다해서 장벽을 치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속삭였던 사랑의 말들은 무가치해졌다. 그는 그런 말을 한 번도 원했던 적이 없었다. 나의 황홀감에 도취되어 그에게 역겨운 말들을 내뱉었던 것이었다. 스스로가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느꼈다. 언제나 엉망이었다고 자책했다. 꽤 자주 멍청한 일을 저지르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닌데 그 순간에 나는 최악이었다.

삶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것이 내가 믿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단단하게 내면에 들어 있다고 믿었던 감정이 무너졌다. 모래처럼 파도에 쓸려갔다. 결국 중심이 텅 비고 말았다. 감정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반짝이고 아름다운 존재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오래 지속될 리가 없지. 그렇게 뜨거운 감정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구나 깨달았다. 달콤한 말들은 텅 빈 공간에서 울리다 사라졌다. 삶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충전하고 그것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짓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끔찍했다.

아침에 그를 만나러 갔다. 그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는데 다행히 그는 문을 열었다. 그가 왜 그토록 열성으로 닫아 걸었던 문을 그 순간 열어 주었던 것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전에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굳이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알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두렵다.

그에게 선물을 부탁했다.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나에게 달라고 말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문득 그 텅 빈 감정이 떠오르고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감정의 폭발에 대해.

울음을 보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을 때에 약 십오 초 정도만 참아내면 딴 생각을 하든 자리를 피하든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할 방도가 생긴다. 울음은 참아 보고 웃음은 참지 말자고 나름의 방향을 잡아두었다. 그런데 이런 일에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아서 아주 격한 감정은 늘 축축해진다. 감각이 생생해지는 열락의 순간에도, 발 밑의 땅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좌절의 순간에도 그렇다. 그렇게 울어버리고 나면 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무언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미안해진다. 죄책감과 죄의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악순환인 것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생긴 일.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제멋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가끔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겨 안거나 젖가슴을 쥐거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내 손을 놓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물어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한 단어로 말해봐요. 그는 슬며시 눈을 뜨고 답했다.

너.

그 말을 듣자 그동안 내 얼굴에 씌워져 있던 꼭 내 얼굴 모양으로 생긴 가면이 찢어졌다.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생긴 일이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더운 날의 편지.

이 더운 날, 당신이 그리워. 너무 더워서 허기도 잊고 말지만, 아무리 더워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아. 지금의 나는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천진하지도 못하지만 그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 사실 난 언제나 추운 날 보다는 더운 날이 좋았거든. 뜨거움이 좋아. 당신이 그리워. 그 뾰족한 콧잔등에 애써 모아 놓은 송글송글 땀방울이 그립고 슬쩍 건드리면 끈적하게 달라붙는 팔뚝이 그리워. 흥건한 땀 냄새와 겨드랑이 냄새과 은근한 사타구니 냄새가 그리워. 당신의 머리카락과 수염, 배꼽 근처에 있는 털에서는 마른 모래 냄새가 나지. 허벅지와 무릎 뒤, 팔꿈치 안쪽에서는 짭쪼름한 비린내가 나. 그 냄새가 그리워서 바다에 가고 싶어.

혼자 있을 때 손등과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는 습관이 생겼어. 스스로 내뿜는 더운 숨을 느끼면서 당신의 숨결이 닿았던 순간을 떠올리거든. 내 입 속에 당신의 손가락이 들어왔던가, 내 손가락이 당신의 입 속으로 들어갔던가, 어느 손이 어느 입술을 찾아가 범하고 말았는지, 또는 어떤 입술이 그 손가락을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는지, 그 끈적한 기억이 모두 더위에 녹아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나봐. 내 손과 내 입술은 서로를 더듬으며 당신을 회상하고 있어. 그렇게 당신을 그리워 할 때마다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고 발가락이 꼬부라지는 기분이 들어.

때로는 당신과 내가 꼭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꼭 연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이 여름은 즐거웠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물론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지도 못했을 테고 팔을 베고 누워서 축축한 겨드랑이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을 테고 더위에 축 늘어진 고환을 핥을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런 일들이 아쉬울 지는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이런 것은 부가적인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신의 삶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해졌을 것 같아. 그 이상을 확인할 수 있다니 더 바랄 게 없네.

여름이 오기 전에 나는 허풍스런 브래지어를 벗어던졌어. 이제 보지 모양을 그려놓은 팬티도 벗어던질 테야. 당신을 만났으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부디 당신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도 자지 처럼 무거운 걸 굳이 달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아. 늘 가랑이 사이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은 꽤나 귀찮을 것 같아. 적어도 이 여름에는, 너무 더우니까 좀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기를, 무더위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2013년 8월 9일 금요일

보내지 않은 편지.

가끔, 그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회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듯해지는 이야기가 내 안에 차고 넘쳐서 가끔은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어떤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가슴 아픈 갈구는 접어둘 때가 된 것 같아요. 선택이란 무언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버리기 아까운 감정이지만 퇴행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하겠지요. 그 시간, 당신이라 다행이에요. 고마와요.

2013년 8월 1일 목요일

볼려요.

"볼려요."

오늘 아침, 간밤에 그가 보내온 메시지에 답장을 하려다가 잠결에 이렇게 적어 보내고 말았다.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웃긴 말이지만 내가 보낸 것이 확실했다. 볼려요,라니 대체 무슨 의도가 담긴 말인가? 점심 때 쯤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해명을 했다.

"아마 보고싶어요 하고 졸려요 하고 동시에 썼나봐요."

그가 답장을 보내왔다.

"혹시 보고싶어요와 졸려요를 합친 게 아니라 꼴려요의 오타가 아닐까요?"

그런 거였구나.무의식이 남긴 기록. 보지가 꼴려요....;;;


연애의 기록.

짭짤하게 고운 소금을 뿌린 얇은 튀김옷이 바삭 부서지면 가늘게 썬 양파와 감자와 오징어와 새우가 촉촉하게 혓바닥에 감기는 독특한 튀김은 무척 맛있었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과 입술을 핥으며 튀김이 담긴 봉지를 끝까지 놓지 않는 나를 보고 그가 말했다. 오천원짜리 튀김인데 맛있게도 먹네, 만족감인지 아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낮게 깔려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나의 왼손을 쥐고 입술 근처로 가져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 그 얇은 피부와 더운 숨이 동시에 손등에 닿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팔꿈치 안쪽, 부드러운 살이 접히는 주름에 입을 맞췄다. 그는 내가 몸을 기대는 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개-되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를 귀찮아하는 주인의 발끝을 따라다니며 눈을 마주치며 꼬리를 흔들어대고, 저를 잡아먹을 지도 모르는 이에게 배를 드러내고 숨통을 끊어놓을 지 모를 손아귀에 목덜미를 맡기는 것, 사랑하는 이에게만 허락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내 안을 헤집고 들어와도 괜찮다고 허락하고 결국 상처입게 되더라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개가 될 수 있다면 행복해질까?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애정의 요소.

친밀감, 외로움, 의존성은 언제나 애정과 혼동된다. 그러나 애정에서 이런 감정들을 제거하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아마도 약간의 온기와 연민이 남아 있겠지.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성감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성감대는 뇌 안에 들어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피부 표면의 감각은 다만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부부 사용 설명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요 네비게이션 아가씨다. 암만 길을 헤매고 다녀도 한 마디 싫은 소리 하는 법 없이, 이 길이 아니다, 다음 골목에서 돌아가라 알려주기만 하거든. 네비 다음으로 좋은 여자가 바로 늬 엄마다. 어느 길로 가면 된다고 알려 주진 않지만 길 잘못 들었다고 잔소리했던 적은 한 번도 없거든."

갈림길을 지나쳐서 한참을 지나가 유턴을 한 뒤 되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말씀. 울 엄마는 차멀미를 하기 때문에 차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어서 운전자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헤매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이번에는 "경로를 이탈했음다~"하는 네비양의 목소리를 듣고 아빠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 채고 말았지만, 잔소리하지 않는 좋은 여자란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 난 뒤에는 한 마디 잔소리도 없었다. 

"애 아바이는 생전 성을 내는 법이 없어요. 우리 둘이서야 투닥거리기도 하고 그라지만 친구들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성을 내거나 면박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몰라."

가족모임 술자리에서 숙모의 말씀. 시댁식구들 앞에서 은근히 남편 흉을 보다가 불쑥 날린 강력한 칭찬 한 방. 그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숙부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면서 앉아 있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부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인가보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결혼에 대한 고민.

1. 사랑과 복수에 대한 경구.

사랑은 앞을 보고 증오는 뒤를 본다. - 미뇽 머거클린


2. 간통죄

간통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나는 간통을 악덕으로 규정하는 건 공산주의적이라 말했다. 사랑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느냐, 나의 정절이 상대의 정절을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다.

친구는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이해가 단편적인 까닭이다. 친구가 사회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인지 아주 그럴듯한 설명을 듣고 내 말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이유를 다시 쓰려니 어렵다. 여튼 공산주의는 관계의 공평함과 상관 없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친구는 반대로 간통죄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형벌이라고 설명했다. 사랑과 생식의 문제를 독점적 또는 일방적인 거래로 인정하고 계약의 위반에 대해 처벌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보다 훨씬 멋진 말로 설명했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말장난은 거기까지였다. 간통죄의 형사 처벌은 다만 사적 복수심을 공적 형벌로 제도화한 것이라는 결론. 무슨 이데올로기에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복수심은 이념이 될 수 없으니까.

사랑이 공평한 분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믿음이 현재의 간통죄를 지지하는 근간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자족적인 감정이다. 사랑이 일종의 권리라고 착각하는 자들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 요즘 간통에 대해 생각하는 걸 보면 결혼할 때가 된 것 같다. 음...

+ 용이의 말

위통 치통 간통 으악, 두통엔 개보린정 간통엔 법정

+ 선배의 말

간통에 대해 생각하다니 결혼할 때가 아니라 이혼할 때가 된 거 아니야?


3. 위기감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끝나는 순간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랑이 사그라들 때는 최선의 노력으로 감정을 죽이는 편이 낫다. 천천히 진행되는 감정의 소모는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4. 외로움에 대해

결혼을 하면 권태감과 싸우게 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존재의 본질적 고독과 싸우게 된다. (물론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도 많다.)

이 말에 대해서 결혼한 선배언니가 밝혀준 결혼의 실상 "결혼을 하면 권태감과 싸우면서 배우자랑 싸우고 그 때문에 환기된 존재의 본질적 고독과 싸우게 되지. 배우자 마저 남이고, 남 맘은 내맘같지 않다는 걸 느끼는 데서 오는 본질적인 고독."

그렇구나.



2013년 5월 13일 월요일

거짓말의 진실.

나는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한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과장하며 내 앞에서 얼마든지 허풍을 떨어도 된다고 알려준다.

얼마 전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나는 그 앞에서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 그 사람이 왜 별로였는지 이유를 묻는 사람 앞에서 딱히 할 말이 없었는데, 방금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내가 거짓말을 할만한 가치가 없는 남자였다.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연애상담의 비결.

연애상담 잘 한다고 소문난 언니의 비법은 어지간하면 헤어져라 조언하는 것이었답니다. 관계를 지속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는 어렵지만 헤어지는 일은 쉽거든요. 그 뒷감당은 자기의 몫이지만.

ㅡ 내 얘기 아님.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부족함과 관대함에 대해.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사랑하기는 쉽다. 고귀한 정신,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직업적 능력, 돋보이는 사교적 태도 같은 장점은 때로 사랑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점 없이 완전무결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처음에 장점이라 생각했던 요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점으로 변하기도 한다. 고귀한 정신세계는 현실적인 무능력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외모는 결국 얼굴값을 지불하게 하는 파국으로 향하며, 직업에서 뛰어난 능력은 대개 일중독으로 증명되고, 사교적으로 활발한 태도는 만인을 향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을 입증하는 데 쓸모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알았던 어떤 사람을 회상할 때 그가 가진 장점을 떠올리다 보면 안도감이 든다. 그는 영리하고 재치있는 남자니까, 경제적으로 풍족했으니까,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니까, 굉장히 잘 생겼으니까, 돈독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잘 살고 있겠지, 괜찮다. 내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남자들에 대해서는 결핍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그 관계 속에서 즐거움만 맛본 뒤에 아주 사소한 이유로 헤어졌을테지만, 그런 이별의 과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완전한 사람은 완전히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핍까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꽤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운동화끈을 꼭 묶지 못하는 둔한 손재주, 나보다도 한심한 기계치, 재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한 요리 솜씨, 만취하도록 마시는 술버릇, 지속적으로 탈모가 진행 중인 두피의 상황 같은 것. 전 남자친구의 단점을 열거하면서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그 큰 덩치로 쪼그려 앉아 운동화끈을 묶기 위해 바둥거리던 모습이라니, 애틋하다. 나는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고 이별 후의 상황을 잘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슬프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오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의 많은 부분을 사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가 나에게 충분히 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수많은 결점을 지켜보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독여준 사람, 그 덕분에 나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관대함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부모도 형제도 아니면서 그토록 아껴주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는 부처님 같이 너그럽고 온화한 남자였다. 우리가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의 결핍을 충분히 바라보고 다독이려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