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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 19 (마지막화)

2014. 01. 08. 수요일

이작가



 지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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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의 밤


철수는 이 술집에서 수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아가씨를 만나고 싶었다. 철수가 알고 있는 민수아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바로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기대감이 동시에 생겼다. 화장실에서 나와 미로 같은 술집 실내를 천천히 걸었다. 방문이 열릴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안을 살펴보았다. 기묘한 설렘과 떨림, 그러나 룸살롱을 빠져나오기까지 수아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철수는 입구에 도착해서 화장실을 알려 준 주먹과 다시 만났다. 용기를 내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그에게 물었다.


“지금 수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먹은 귀찮다는 투로 철수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단단한 플라스틱 명함에는 ‘강남 골프’라는 상호와 ‘김진아 실장’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철수는 명함을 받아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주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주먹은 철수의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등을 떠미는 듯한 기세로 몰아냈다. 그러면서도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놀러 오십시오.”


제 발로 쫓겨나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면서 철수는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업소에 수아라는 아가씨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주먹은 위압적인 태도로 다음을 기약했다. 수아는 오늘 출근하지 않았거나 어느 방 안에서 일하는 중이라는 걸까. 철수는 계단참에 멈춰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수아를 만나려면 손님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수는 골프숍으로 위장한 룸살롱의 명함을 소중하게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술집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사이로 동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들렸다. 장재완 대리는 연초에 무리를 해서 일본산 중형차를 계약했다. 하지만 차를 사 놓고는 대출금을 갚느라 생활이 빠듯했다. 강남역에 주차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는데 주차비는커녕 기름값을 대기도 허덕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타고 다니지도 못하는 차를 자랑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법무과장은 법무과 업무에는 성과급이 없다는 점이 불만이었다. 여직원과 남직원의 직능은 입사할 때부터 퇴사할 때까지 달랐고 콘돌리자 과장은 더 이상 승진을 꿈꿀 수도 없었다. 남대문에서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상점에서 일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시작은 허술했으나 사무실에서 오래 일한 직원들 중 여전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는 이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콘돌리자 과장은 자신의 일본어 실력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주위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을 하면서 일본어 재주를 써먹을 일이 없기도 했다.

박치훈 과장은 이 술자리를 마치고 다음 차수로 넘어가기를 바라며 부어라 마셔라 연신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신이 나는 척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어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이제 좋은 데 갈까요?’ ‘이 잔만 비우고 나가실까요?’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술자리를 옮길 결정권을 가진 본사 보안과장과 사장은 그들이 본사에서 함께 일할 때 알았던 다른 선배의 뒷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러는 와중에 오진성은 고현지에게 지분대고 있었다. 꽤 많이 취해서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현지에게 집이 어디인지를 자꾸 캐물었다. 현지는 마뜩찮은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진성의 호기로운 제안을 거절했다.


“건대 입구에서 가까워요.”

“그래. 이 오오빠가 바래다 준다니까 그러네.” 

“역세권이라 현지 혼자 가도 안 위험해요.”


고현지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오진성은 현지가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했고 그의 상체는 점점 현지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철수는 괜히 오진성에게 화가 났다. 철수는 붉어진 눈으로 오진성을 노려보았다.

제정신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조황진 과장이었다. 조황진이 철수를 달래듯 사근사근 말을 붙였다.


“철수 여자친구는 잘 있어?”

“지금 호주에 갔습니다.”

“호주는 왜?”

“워킹홀리데이 간다고.”

“언제 오는데?”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그래도 기다려 봐야죠.”


조황진 과장과 말을 섞으면서도 철수의 시선은 오진성에게 향해 있었다. 취기와 객기가 뒤엉켜 눈알이 뜨거워졌다. 그 뜨거운 시선을 현지마저 알아차렸으나 정작 당사자인 오진성은 철수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내들의 세계에 익숙한 조황진은 두 녀석을 이대로 두었다간 뒤끝이 좋지 않은 사고가 벌어지게 되리라 직감했다. 조황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철수를 일으켜 세웠다. 주량이 한계를 넘어선 것이 분명한 철수가 사고를 치기 전에 그만 들어가 보라고 억지로 권했다.

철수는 동료들을 남겨두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휘척휘척. 강남대로를 따라 술에 취한 사람들이 좀비 같이 움직였다. 밤은 피부에 생긴 멍자국처럼 푸르스름하게 얼룩져 보였다.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나는 네온사인과 가로등의 밝은 불빛이 묵직하고 두텁게 느껴졌다. 철수는 만약 손을 뻗어 빛을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이 토끼털 같이 부드러운 감촉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렇게 두 팔로 허공을 더듬으니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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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노점에서 팔고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수레 위에 커다란 곰 인형과 혀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 인형, 바닥에 엎드린 얼룩 고양이와 열쇠고리에 매달린 노랑 오리까지, 보송보송한 봉제인형이 가득했다. 순식간에 낯선 세계가 펼쳐졌다. 철수는 수레 앞에 서서 빼곡하게 쌓여 있는 봉제인형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손을 뻗어 주먹만 한 크기의 코알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코알라의 앞발 부분에 집게가 숨겨져 있어서 어딘가 달아놓을 수 있는 인형이었다. 집게를 눌렀다 놓으면 플라스틱으로 만든 코알라의 손이 딱딱 소리를 냈다. 그렇게 코알라 인형으로 박수를 치다가 철수는 지갑을 꺼내서 인형 값을 치렀다.


“귀여워라. 저 사주시는 거예요?”


철수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현지였다. 군대에서 심하게 다친 뒤로 철수의 왼쪽 눈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지가 옆에 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 곁에 서 있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 자란 사내가 인형의 세계에 빠져서 정신을 놓고 있는 모습을 여자에게 들킨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는 철수가 코알라 인형을 들고 장난을 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당연히 저를 위한 선물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노점 수레에 설치된 밝은 조명 불을 받아 취기에 붉게 달아오른 현지의 뺨이 반짝반짝 빛났다. 발그레한 양 볼의 솜털까지 빛이 났다. 인형의 세계에 가까운 어린 여자의 웃음을 보자 철수는 기꺼이 인형을 내밀었다. 현지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부끄러운 듯 덥석 손을 내지는 않았다. 철수가 코알라의 앞발 집게를 벌려서 현지의 핸드백 손잡이에 인형을 매달아 주었다. 현지는 가방에 달린 작은 털뭉치를 내려다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 철수를 향해 말했다.


“주임님. 현지랑 맥주 한 잔 더 드실래요?”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를 듣자 철수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지가 술집에서 철수의 뒤를 따라 나온 것이 분명했다. 철수가 황급하게 그들이 빠져나온 술집 골목을 살폈다. 다른 동료들이 이 모습을 목격하기 전에 어서 자리를 떠야 했다. 인형을 받아들고 배시시 웃고 있는 현지가 원망스러웠다. 철수는 자괴감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사장의 컴퓨터를 이용해서 메인서버에 접속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며칠에 걸쳐서 이런 일을 하다가는 의심을 살 것이다.


“오늘은 좀 그런데…”

“아, 맞다. 오늘 저녁에 할 일 있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일인데요?”


철수가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중에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카카오톡 메시지가 들어왔다. ‘연아(하트) 왜전화안해요?’ 모르는 사람인데, 하면서 채팅창을 열어보는 순간 기억이 났다. 박치훈 과장이 담당한 채무자였다.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자의 손님이 가게에 와 있을 때, 전화를 걸어서 빚이 얼마나 되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했었다. 철수가 채팅내용을 확인하자 여자로부터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왔다. ‘지금전화’ ‘분위기좋으니까’ ‘얼른’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현지가 고개를 빼고 철수의 전화기를 살펴보았다. 프로필에 예쁘장한 여자 사진이 뜨는 걸 보고는 내심 경계하며 물었다.


“누구에요?”

“채무자에요.”

“어… 현지는 잘 모르지만 밤에는 전화하고 문자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요.”

“오늘 밤에 이 채무자 만나기로 했던 거예요?”

“아니에요.”

“근데 왜 톡하세요?”


철수는 꼬치꼬치 캐묻는 현지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의혹을 살 만한 상황이었다. 이 채무자에 대해서 박치훈 과장에게 연락을 해 주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도 꽤나 술에 취해서 일을 할 정신은 없을 것 같았다. 박치훈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회사 사람들이 철수가 현지와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철수는 현지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저 술은 더 못 마실 것 같아서…”

“그럼 커피나 한 잔 하실래요?”

“그래요.”


철수가 재빨리 길가의 편의점으로 달려 들어갔다. 2+1 행사 중인 캔커피 세 개를 사들고 나왔다. 현지에게 하나를 주자 현지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자 철수는 다급한 마음에 캔커피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현지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아니라고, 야밤에 카페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라고,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철수는 알아채지 못했다. 현지가 실망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터덜터덜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으나 철수는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철수는 편의점 앞에서 캔을 열어 단숨에 커피를 들이켰다.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가 목구멍을 적시자 그제사 갈증을 느끼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남은 캔커피 하나도 마저 마셔버릴까, 아니면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갈까, 고민하다 생각이 났다. 한참 전부터 서류가방이 손에 없었다. 언제부터였나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 술집에서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수아의 대출서류를 찢어 버리고서 가방을 잊고 나왔다.

잰 걸음으로 아까의 술집 화장실을 향했다. 사람 많은 곳에서 몇 시간이나 지났으니 여전히 그 자리에 물건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가방은 이미 사라졌다. 구두자국과 배설물과 토사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화장실에서 철수는 깔끔하게 미련을 버렸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게다가 가방을 잃어버린 사건은 오늘 있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점을 분명히 확인해주는 증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라리 모든 것이 손을 떠나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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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나오는 길에 다시 한번 회사 사람들과 마주쳤다. 본사 보안과장과 사장을 필두로 조황진과 박치훈, 한승철 과장 일행이 일차를 정리하고 나와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박치훈 과장이 철수를 발견하고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어이, 브라더~”


한껏 들뜬 목소리, 전에 없이 친근한 말투였다. 술 냄새가 훅 밀려오며 동시에 그의 체중이 철수의 왜소한 몸을 짓눌렀다. 철수는 힘겹게 박치훈을 어깨로 밀면서 일으켜 세웠다. 조황진 과장이 다가와 거들었다. 그러자 박치훈은 철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조황진에게 기대듯이 어깨동무를 했다. 박치훈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조황진에 의지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연민이 밀려왔다. 박치훈은 술에 취한 밤이면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아가씨들이 나오는 유흥업소를 향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유흥업소를 찾아가는 사내들의 뒤를 따르면서 철수는 심란해졌다. 어느 업소에서 수아라는 아가씨를 다시 만날까 두려웠다. 만약 철수가 수아를 찾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떻게든 이미 추적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아의 흔적을 찾아낸다고 해서 그 그림자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철수는 수아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수아의 빈자리를 실감하지 않더라도 자취생활은 외롭고 고단했다. 그리고 철수는 박치훈 과장이나 장재완 대리 같이 유흥업소를 들락거리며 외로움을 달래고 싶지 않았다. 철수는 여러 번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수아를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여자를 만나 어떻게든 결혼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여자라도 아이를 낳아 기르고 결혼생활에 찌들게 되면 잔소리를 쏟아내는 마누라가 되리라. 그때쯤 되면 철수도 회사생활에 찌든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자식이 자라는 과정은 흐뭇하겠지만 아이들이 훌쩍 자란 뒤에는 더 이상 아빠를 상대해 주지 않을 게다. 아내는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남편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철수도 다른 아저씨들이 그러하듯 캔디나 미미 같은 아가씨를 찾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을 아내에게 들킨다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질 테고.

텔레비전 광고에 따르면 인생은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않은 것이었다. 남자는 동창회에 나가서 중형차를 보여주며 성공을 입증하고, 여자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서 드레스를 걸치고 와인을 마시며, 그 집에 사는 아이는 동무에게 얼음 나오는 정수기를 자랑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화목한 가정은 그런 그림이어야 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산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철수는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발걸음을 멈췄다.

인사도 하지 않고 일행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옷을 벗었다. 셔츠와 속옷을 빨래바구니에 넣고 한 벌 뿐인 양복 재킷과 바지는 옷걸이에 걸어 섬유탈취제를 뿌려놓았다.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연결하면서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왔던 채무자가 떠올랐다. 애타게 영감님을 속여 줄 전화를 기다렸을 테지. 하지만 이제와 박치훈 과장에게 사실을 알린대도 해결하긴 너무 늦었다.

다음으로 현지가 생각났다. 잘 들어갔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애꿎은 전화 때문에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싶었다. 코알라 인형 때문에 괜히 앞으로 관계가 어색해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독거리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연락을 하는 편이 도리어 흠 잡히기 좋은 구실이 아닐까 싶었다.

샤워를 하려고 안경을 벗으면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새 안경을 맞춰드려야지 하는 결심, 그러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기에도 시간이 너무 늦었다. 별로 급한 일도 아닌데 굳이 밤중에 전화를 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내일 아침이나 오후의 적당한 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 여유가 있을지는 내일이 되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철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계획하며 현재를 살았다. 그러나 과거는 설명하기 어려웠고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현재는 언제나 늦어 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매일매일이 늦어지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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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 18

2013. 12. 18. 수요일
이작가


18. 화장실

 
일행은 우르르 술집으로 몰려갔다. 지난 달 보안감사를 마치고 회식을 했을 때 보안과장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었다. 장재완이 문을 열어젖히자 보안과장이 안으로 들어갔고 사장이 뒤를 따랐다. 다른 직원들도 줄을 지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웨이터로 일하던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장재완이 정중한 태도로 유리문을 붙잡고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맨 마지막에 남은 철수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재완과 눈이 마주치자 차마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철수는 서류가방을 다시 한번 바짝 몸으로 당겨 들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장재완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막 청소를 마친 듯 깨끗했다. 철수는 줄지어 늘어선 소변기를 지나쳐 대변기가 있는 칸막이로 향했다. 두 칸 중 한 칸은 청소 용구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는데 다른 한 칸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좌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꼭 끌어안고 있던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자 긴장이 풀렸다. 철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방을 열었다. 수아의 채권 관련 서류가 담긴 파일은 철수가 서고에서 빼내 가방에 넣어 둔 그대로 담겨 있었다. 클리어파일을 펼쳐서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금전소비대차계약서, 신분증 사본, 주민등록초본, 수아가 근무했던 적이 없는 알 수 없는 회사의 재직증명서도 있었다. 철수는 서류들을 조심스럽게 파일에서 꺼냈다.

이 문서를 계속 들고 있다가는 언제 꼬리가 잡힐지 몰랐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가방을 열어 본다면,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려 내용물이 쏟아진다면, 만에 하나라도 가방을 분실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수아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회사 보유 채권을 외부로 빼돌린 사실을 들킨다면 그 결과는 철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철수는 양손으로 서류를 움켜쥐고 반으로 찢었다. 절반이 된 종이를 포개어 또 찢었다. 다시, 또 다시,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철수는 손톱만한 조각이 되기까지 종잇장을 열심히 찢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각을 그러모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토록 오래도록 수아를 괴롭혔던 채무가 한 줌의 종잇조각이 되어버렸다.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서류가방과 텅 빈 파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화장실 벽에 설치된 고리에 걸쳐 놓고 파일은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변기 뚜껑을 열고 찢어진 종이 뭉치를 쏟아 버렸다. 변기통에 고여 있던 물 위로 종잇조각이 둥둥 떠올랐다. 수아의 이름이 보였고 잘려나간 얼굴 사진이 보였다.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눈을 질끈 감고 수세식 변기의 밸브를 내렸다. 우르르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이 하수구로 사라졌다. 그러나 흔적이 단번에 사라지지 않고 작은 쪼가리 몇 개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철수는 수조의 물이 다시 차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흘려보냈다. 변기 안을 집요하게 살피며 여러 번 물을 내렸다. 모든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철수의 얼굴은 눈에서 흐른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재빨리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이 자리에서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도록 식탁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술집으로 들어가니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치훈 과장이 문간에서 두리번대는 철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서 어렵지 않게 일행을 찾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안주접시가 깔려 있었고 술잔이 몇 차례 돌아간 분위기였다. 비어 있는 의자는 콘돌리자 라이스 법무과장의 옆이었다. 철수가 의자에 앉자마자 박치훈 과장이 철수에게 소주잔을 내밀고 술을 따라 주었다. 철수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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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훈은 철수를 놀리듯이 말했다.

“김철수, 벌써 토하고 왔냐? 얼마나 토했길래 눈깔이 시뻘개.”

철수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화장실에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세수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리자 물기가 느껴졌다. 누가 볼 새라 맨손으로 빠르게 얼굴을 닦아냈다. 박치훈은 철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핀잔을 주었다.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냄새만 맡아도 취하냐?”

회사 안에서는 철수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 없는 박치훈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박치훈은 제 앞에 놓인 빈 술잔을 들어 보였다. 철수가 엉덩이를 들고 팔을 뻗어 조금 떨어져 있는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박치훈은 철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오른편에 앉은 현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인데…”

현지는 박치훈 과장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고 맞은편에 앉은 철수와 법무과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지의 분홍빛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으나 법무과장은 현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도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철수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낚아챘다.

박치훈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 한숨을 들이키더니 쯥쯥 소리를 냈다. 빈 술잔을 앞으로 내밀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나는 술이든 여자든 21년산이 좋던데.”
“뭔 소리여? 21년산 보다 30년산이 좋지.”


콘돌리자 라이스가 퉁을 놓으며 박치훈의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급하게 따른 술이 넘쳐 박치훈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박치훈은 투덜대면서도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법무과장님 사랑이 넘치셔.”
“너무 넘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네.”


콘돌리자 라이스는 탁 소리가 나게 술병을 내려놓았다. 탁자에 유리병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조황진 과장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쪽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조황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찬찬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철수를 향해 말했다.

“아, 철수는 매운 거 못 먹잖아. 계란찜 시켜줄까?”

식탁 위에 놓인 메뉴는 매운 쭈꾸미 삼겹살 볶음이었다. 철수는 조황진이 챙겨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작은 연체동물과 돼지의 목덜미에서 잘라낸 살코기 위로 기름기에 번들거리는 붉은 양념이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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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젓가락을 집어 들며 조황진에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쭈꾸미 좋아합니다.”

철수는 조황진과 눈을 마주치며 맵고 짠 안주를 먹어치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맛이 입 안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꿀꺽 삼켜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열기가 전해졌다.

사실 철수는 매운맛을 전혀 즐기지 않았다. 즐기지 않을 뿐 아니라 견디지도 못했다. 붉은색 음식물을 입에 넣으면 그것이 내장을 아주 빠른 속도로 통과해 액상에 가까운 형태로 배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수는 기꺼이 매운 양념으로 범벅된 쭈꾸미와 삼겹살을 연신 집어 먹었다.

원하는 것을 하나 얻었으면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고 철수는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 어떤 일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혓바닥과 입천장이 화끈 달아올랐다. 매운 입을 헹구려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먹고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술이 들어가자 모두들 목소리가 커졌다. 사장은 추심업계의 선배인 본사 보안과장을 향해 뻐기듯이 말했다.

“토토머니라고 재호 선배 들어간 회사 있잖습니까. 요즘 엄청 잘나가는 모양입니다. 거기도 추심원 많이 필요하다고 저보고 오라는 겁니다. 지지난 주에 얼굴 보자고 그래서 만났는데 거기 사장도 같이 나왔지 뭡니까. 아니, 토토 사장이 저한테 뭐라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 기본으로 오백은 깔아 줄게 그러는 겁니다. 참 나, 어떻게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들어간답니까?”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자신은 늑대이지만 경쟁사의 사장은 고작 개에 불과하다는 근사한 비유를 들었다. 철수는 사장의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영화 타짜에 나온 대사가 아니었던가? 철수는 잠시 영화에서 주인공 곤이가 고작 한 끝을 들고 오억을 배팅했던 아슬아슬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장의 말에 기분이 상한 본사 보안과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사장의 결혼생활과 2세 문제로 돌려버렸다.

“제수씨는 뭐 좋은 소식 없어?”
“저희 맞벌이라 바쁘잖습니까.”
“임마, 미룰 걸 미뤄야지. 오늘 당장 애를 만들어도 열 달 지나야 태어나. 애가 스무 살 되면, 니가 나이가 몇 개냐? 애 대학 가기도 전에 퇴직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니가 정년까지 뻐팅길 거 같아? 암만 둘이 벌어 모아 놓는다 해도 애 낳아 봐라.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야. 어차피 낳을 거면 제수씨 설득해서 얼른얼른 해치워. 더 늙으면 애도 잘 안 생겨.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보안과장은 사장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으나 어른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회사에서 승진할 길이 보이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을 길도 없는 중년의 남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랑거리는 마흔이 되어 얻은 딸자식 뿐이었다. 보안과장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장은 관심 없는 체 곁눈으로 흘끔거렸지만 표정에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철수는 건너 테이블에 앉은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매각채권 목록에서 수아의 기록을 삭제할 방법을 구상했다. 단 한 사람의 데이터가 지워진다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삭제한다면 어떨까?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장의 데스크탑으로 메인서버에 접속해 그 일을 처리해야겠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누군가 사무실에 들이닥친대도 늘 그랬듯이 철수가 사무실의 모든 컴퓨터 전원을 켜 놓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에 하나 나중에 데이터 삭제가 드러나 문제가 된다고 해도 사장의 컴퓨터가 진원지로 밝혀진다면 그 자신이 나서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할 것이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 철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같이 안도감이 들었다. 평소와 달리 연거푸 술잔을 비우다 보니 이성이 마비된 탓도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사장과 보안과장이 결혼생활의 희로애락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철수에게까지 들렸다. 보안과장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의 영특함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로 모빌에 대한 집요한 관찰력과 탐구심을 거론했고, 딸의 귀여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도리도리 잼잼의 율동성에 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했다. 딸에게 그토록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일찍 귀가하는 대신 술집에서 자신을 존중하지도 않는 후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철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계속해서 술잔을 들었다. 위장이 울렁이는 느낌을 억누르며 목구멍으로 술을 밀어 넣었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위장이 아니라 대장이 문제였다. 철수의 몸속을 가득 채운 캡사이신과 알코올이 혼합되어 대장의 민감한 내벽을 자극한 지 오래였다. 꾸르르 꾸르르 분명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철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철수를 향했다. 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박치훈 과장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오늘따라 존나 달리더니만.”

철수는 달렸다.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화장실 입구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화장실의 좌변기는 하나 뿐, 수아의 이름과 얼굴이 인쇄된 종잇조각을 흘려보낸 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배설을 할 수는 없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 좌변기를 이용하게 되겠지만 철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엘레베이터는 8층에 머물러 있었다. 철수는 비상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짝 힘을 주고 천천히 조심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보니 아래층과는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분위기도 딴판이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벽은 색색의 대리석으로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사자 모양 대리석 조각과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죽소파가 보였다. 이곳이 말로만 들었던 룸살롱인가?

반짝거리는 은색 조끼를 차려입은 웨이터가 철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혼자 오셨습니까?”

철수는 다시 한 번 괄약근을 조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생 처음 와 본 유흥주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철수가 머뭇거리고 있자 어디선가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박박 깎은 민둥머리에 자잘한 흉터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듯한 런닝셔츠 사이로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팍에 울긋불긋한 문신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주먹’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먹은 정중하게 말했다. 철수의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설사가 급한 와중에도 공포가 엄습했다. 긴장감 때문에 금방이라도 실수를 해버릴 것만 같았다. 철수는 주먹을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화장실 좀…”

주먹은 피식 웃더니 다시 물었다.

“작은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큰 일이에요. 큰 일, 급해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주먹이 성큼 앞장을 섰다. 실내는 미로같이 복잡했다. 방 안에서 음악 소리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간이 문이 열리고 야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과 쟁반을 든 웨이터들이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복도에서 주먹과 마주치면 목례를 하고 벽에 붙어 섰다. 철수는 이 낯선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자기 내부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를 폭발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복도를 돌고 돌아 마침내 화장실에 도착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하얀 좌변기가 보였다. 철수는 후다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끌어 내리고 변기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힘이 풀리고 배설물이 변기를 때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촤르르. 그리고 철컥,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수는 주먹에게 감사의 말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변기를 향해 달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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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륵주륵 설사는 멈출 듯 하다 다시 흘러나오기를 반복했다. 철수는 양손으로 번갈아가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이 화장실은 룸살롱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변기 옆에는 세면대와 샤워기 꼭지가 있었다. 샴푸며 비누 따위가 놓인 선반도 있었으며 구석에는 세탁기까지 있었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독한 담배 냄새 사이로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타일바닥에는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빳빳한 검은 생머리, 곱슬곱슬한 노란 머리, 불그스레한 빛깔의 짧은 머리…….

바닥을 살피다 고개를 들어 보니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명단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아가씨 일요일 출근표’ 그 아래로 ‘날짜, 본인 조 이름 꼭 확인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표는 근무 날짜에 따라 네 개의 조로 나누어진 아가씨들의 명단이었다. 제니, 가영, 다빈, 유리, 이슬, 사랑, 나나, 세나, 태희, 유미… 백 명이 넘는 여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명단을 살펴보다 철수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C조의 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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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본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칭으로 이런 이름을 선택하는 아가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설령 민수아가 유흥업소에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제 이름 대신에 수애나 정아, 또는 전혀 다른 민희 같은 가명을 쓸 것이다. 이 업소의 아가씨 명단 속에서 발견한 수아가 김철수가 알고 있는 민수아가 아닐 것이다. 철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철수의 몸은 그녀를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함께 보낸 시간 동안 느꼈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부드러운 젖가슴과 벌어진 입술과 축축하게 뒤엉키던 혀와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와 철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지저분한 화장실의 악취가 사라지고 따듯한 살내음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오른손이 어느새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철수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장을 쏟아낼 기세로 설사를 분출해 낸 변기통에 정액을 받아 낸 두루마리 화장지 뭉치까지 집어넣고 나서 물을 내렸다.

수세식 좌변기는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씻어 내렸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철수는 한참동안 변기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랑이 사이로 변기통에 맑은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혼을 어딘가에 보관할 수 있다면 이 변기 속에 집어넣어 흘려보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