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8일 목요일

태양이 키운 식물.


농업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농업기술에 대한 정보를 종종 찾아보곤 한다. 실내에서 LED조명을 이용해 식물을 기르는 신기술이 개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래저래 자료를 찾아보았다. 발전에 소모되는 비용을 생각하면 채산성이 떨어지는 방식이지만, 대기가 핵먼지로 뒤덮여서 태양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이런 기술이 유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비극적인 미래를 상상하지 않을지라도 지하나 해저에서 식물을 키운다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태양이 키운 식물은 지금의 유기농산물과 같이 희귀한 가치를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다. '논에서 키운 쌀'이나 '밭에서 키운 파프리카'가 비싼 값에 마트 쇼케이스에 놓여있다고 상상하니 왜인지 슬프다.
 
 


사진출처
http://gizmodo.com/5791306/forget-the-sun-leds-are-the-future-of-farming

문제.

- 이야기가 전환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 인물에 대해 좀 더 과감하게 설명해도 괜찮다.

먹기의 지겨움.




내가 나를 먹는다.

따먹고 뜯어먹고 빼먹고 씹어먹고. 

 단식이 필요한 시점이구나.


마리와 킴.

소설의 수정, 퇴고는 지루한 과정이다. 내가 만들어낸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표현하는 과정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적지 않다. 어쨌든 내 손으로 끝내야 하는 일이니 소모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아아 지겹다. 새 이야기 쓰고 싶어, 다음 작품 다음 작품 빨리 넘어가면 좋겠다. 새로운 이야기로 빨리 넘어가고 싶어서 시놉시스를 쓰려다가 미뤄놨다. 다음주까지는 무조건 끝내야지. 1350매까지만 맞추자.

말러.

우울우울 열매를 먹고 며칠 동안 축 늘어져 있었다.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환청을 들었고 모래로 만든 도시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는 환각을 보았다. 게다가 근육통까지 심해졌다.

말러의 교향곡을 들었다. 우리나라에 말러가 유행하게 된 시기를 생각해보면 불경기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아님 말고.) 말러의 교향곡을 듣다보면 우울해진다기보단 허물어지는 느낌, 악기의 소리가 조직되고 단단해지고 뭉쳐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허술해지고 흐트러지는 느낌이다. 피곤할 때 들으면 피로를 직시할 수 있게 되는데 요즘 계속 피곤했기 때문에 너무 똑바로 보고 말았다.

이영진 선생님은 말술이나 말보로보다 말러가 더 좋다고 했다. 피곤할 때 술을 마시듯 피곤할 땐 말러 9번 교향곡을 들으라고 권하셨다. 특히 4악장.

말러의 9번 교향곡만 모아둔 플레이리스트
http://www.youtube.com/watch?v=3eUKpw21ASc&list=PLrVIl7jERwCM2AusHia6havi0u9VKXbnC

첫번째는 발터의 연주, 이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말러의 직계 제자이며 역시 유태인이었고, 나치에 의해 비엔나에서 뜨기 직전의 실황연주라고 한다. 이 연주회 후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갔다고.

이해하기.


“난 도무지 여자를 이해할 수 없어.” 그가 대답했다.
“이런, 제럴드.” 내가 말했다. “여자는 사랑을 해야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_오스카 와일드 『캔터빌의 유령』(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난 도무지 남자를 이해할 수 없어.” 그녀가 대답했다.
 “이런, 로라.” 내가 말했다. “남자는 조련을 해야지 이해하려고 하면 안 돼.”
_ 문득 이런 패러디에 대한 남자들의 감상은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박성국(박): 저는 위의 원문에서, 여성을 수동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남성주의적 시선에서 비롯된 불편함을 느낍니다. 해당 패러디에서는, 남성을 개나 애로 취급하는 여성의 우월의식에 대해 반감을 느낍니다. "나 애 아니야! 컹컹!"

이동현(이): ㅇㅇ 저는 원문을 읽고서 좌절감을 느꼈어요.

박: 한국의 댄디들 중 나이 불문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아요. 일단 사리사욕을 챙기는 것에는 거리를 두고, 예술가로서의 정신적 귀족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여성은 사랑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실로 역사가 반복된다는 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담론-신체의 결합으로 재생산된다는 말이겠죠. (중략) 근데 이 태도는 일단 남성의 그 지속적인 성욕과 섹스 판타지와 결합한 거라, 윤리적인 잣대 없이 그런 태도가 억제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이: 좌절의 이유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은 저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위의 문장에 따르자면 사랑받기를 원하는 욕망과 자기존중감의 거래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남자 또는 남성성에 대해 규정할 때는 자기검열이나 배려심 같은 것을 필터로 사용하기 마련인데 반해, 남자들이 여자에 또는 여성성에 대해 규정할 때는 꽤나 과감하게 결과물을 내보이는 경향이 있더군요. 종종 상처받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저 역시 성욕과 섹스판타지가 강렬한 타입이지만, 그것이 남성을 객체화하고 대상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남자들에겐 왜 그것이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그보다 먼저, 객체화하고 대상화된 상대와의 섹스가 좋을까 의문이에요.

박: 보수적 남성은 처녀성을 전제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섹스-수동적 객체화), 댄디들 역시 여성을 자신이 사랑을 주고 봉사해주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섹스-수동적 객체화). 일단은 남근이라는 상징적 권력 탓이 아닐지. 나는 있는데, 여자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줘야 되는 거고, 주는 사람이 갑이고 받는 사람이 을이니까 나는 성적으로 적극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국 음악가들에게도 엄청나게 보편적인 태도죠, 스토니 스컹크의 노래에서도 "여자들아 침대로 와랔ㅋ" 이런 내용의 가사가 있기도 하고. 찾아보면 아마 그런 남근주의적 인식들이 드러난 언어들로 산을 쌓을 듯.

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걸 두고 뭐라 하기 어렵지만, 자지가 단단해지고 정액이 나오는 과정이 그렇게나 감동적이었을까 싶고, 그래서 그것을 호혜적으로 남에게 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걸까 싶어요. 게다가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다니 딱 십 분만 지나고 돌이켜 생각해봐도 부끄럽고 쑥쓰러울 텐데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요.

박: 확실히 남근은 남성이 갖는 경이로울 정도의 절대적인 힘과 자신감의 원천이예요. 발기부전치료를 받다가 고자가 된;; 남성들이 잃는 자신감과 그들이 느끼는 절망은 끔찍할 정도라고 하네요. 공허한 거죠, 단단해지거나 정액을 내지 못하니까. 인터뷰를 봤는데, 제 입장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이 느낌을 모를 거라고 해요. 극도로 이기적인 한국 마초의 경우에는 누나-동생하던 사이인데도 의식이 없는 연상의 여성을 강간하고 그걸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하더군요. 결국 객체화-대상화가 낳는 극단적인 폭력의 사례지요.
Los Angeles 거주/백인 사회에 편입 못한 한인 남성들: 지인을 통해 전해들었는데 이 친구는 자기 만나면서 돈을 원하는 여자들이 싫어서 그런 여성들에게 "벌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나봐요. 또 다른 친구는 자기가 어떤 여자에게 잘해줬는데 결국 헤어지고, 그것 땜에 상처를 받아서 조금 사귀고 섹스하다가 헤어지고를 여러 차례 반복. 결국 "여자는 다 똑같애"류의 객체화, 대상화가 일방적 폭력을 유발하는 시발점이죠.

신: 여튼 유머의 진실은 우주를 한 바퀴 돌리는 데에 있으니 !! 수긍이 가는 패러디입니다.


--- 페이스북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믿는다면,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도 바랄 수 있겠지.


마초의 조건.

마초가 되기 위해서 남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어린 남자를 애 다루듯 하면서 그의 가치관 자체를 부정하는 유사-조언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여성들에게서 나는 엄청난 반감을 느낀다. 일단 남성들의 '퉁치기'나 '나누기'와 구분되는 여성들의 '삐지기'부터 이해할 수 없다. 그녀들은 내가 고려하는 사항들과 조금 다른 사항들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듯 하다. 내가 어려서 모르는 건가? 크르릉. 아, 맞다. 이건 간단히 꼰대라는 집합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 박성국


계집애 주제에 남근중심사회에서 버티려면 가랑이 사이에 딜도 하나쯤 장착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숨.)

위로.

따듯한 위로를 경험하는 일은 참 좋다.
위로의 갑은 백허그로구나.

밤.

아프다.
아프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녹색집게산악회.

녹색당 녹색집게산악회



녹색당 녹색집게 산악회 두 번째 산행
2013년 2월 24일 일요일 서울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산을 향해 수많은 걸음을 옮겼습니다.


산 속에 외롭게 버려진 막걸리통을 찾아내고
이지컷 커피믹스 꽁다리를 주워 모았지요.


해발고도 300미터가 넘는 험준한 계단길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인왕산과 북악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하문 북쪽의 길이라는 뜻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탐방로 곳곳에


이런저런 주의사항도 있었고요.




청와대 뒷길 북악산으로 접어드니
입산규정도 엄격해졌고 감시도 철저한 만큼
길에 쓰레기나 담배꽁초가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덕분에 허리 펴고 멋쟁이 소나무님과 인사했습니다.



다함께 녹색 집게 손에 들고 산을 올라요!

ㅡ 페이스북 그룹 "녹색 집게 산악회"
회원 가입 문의는 권철현 선생님께!

잠과 꿈.

내가 잠을 자꾸 자게 되는 이유는 현실보다 잠이 좋기 때문인 것 같아. 꿈 속에서 아무리 슬픈 일을 겪어도 현실에서 겪는 것만큼 괴롭지는 않거든.

공허감.

그를 생각할 때면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숨이 막히고 점점 몸이 차가워지며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나면 눈물이 난다. 참을 수 없는 슬픔, 감정의 역류는 거칠고 격하다.

공허감, 텅 빈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내부에서 무언가가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절단된 손에서 통증을 느끼듯이 절단된 감정에서 고통을 느낀다. 상실한 것은 더욱 값진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그것은 사실 상 내 생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앞으로 내가 그보다 온전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를 떠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기억한다. 이 모든 일을 후회할 수 있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으며 돌아올 수 없다.

상실감이 나에게 남아 있는 것들의 가치를 폄훼하거나 무시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애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평가할 때 여전히 가치 있는 여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존중, 배려, 애정, 쾌락, 포용력, 이해심, 공평함 같은 것들은 아직도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좋은 부분들이다.

그러나 광기어린 열정은 일어나지 않으며 맹목적인 헌신이나 희생은 고갈되고 말았다. 이것은 연애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지만 아름다운 부분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상실한 것들은 결코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그러한 것을 받고 싶다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그런 것을 내 안에 채워넣으려 한다면 나는 다시 깊은 바다 안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2013년 2월 26일 화요일

꿈.

임신한 여자의 둥근 배 위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자였지만 그것은 일종의 낙인 같았다. 그 여자 또는 임신중인 태아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표시하기 위해서 새겨놓은 문신이었다. 나는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그녀를 보았다.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여자는 일몸으로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고 뒤뚱거리며 힘겹게 움직였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자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가랑이 사이에 앉았다. 그래서 그녀의 음부와 배에 새긴 문신을 가려주었다. 고양이가 가려주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그러나 리모콘이 작동하지 않았고 임신한 여자가 알몸으로 무릎꿇고 앉아있는 모습이 계속 방송됐다.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아도 섬뜩하고 잔혹한 꿈이었다.

모래.

근육통이 심하다. 몸이 아파서 우울하다. 말러의 교향곡 9번을 다시 듣고 있다. 모래로 만든 도시가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