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이해하기 위한 노력.

오래 좋아했던 선생님이 최근 했던 이야기 몇 마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합리적인 보수주의 또는 인생의 관성으로 인한 한계라고 납득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 우성학적인 힘의 논리를 지지하고 있구나. 예전에 했던 이야기에서도 그런 암시가 숨어있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그는 약자에게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다. 한때 나는 그런 태도가 공정함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그가 했던 몇 마디 말은 심지어 나를 때리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몇 번이고 재구성했다.

관계의 종결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만나서 불편한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니까. 사람을 싫어하게 되는 것보다는 더 이상 존경을 표현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새벽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허약해졌기 때문에 힘의 논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닐까? 노년기에 접어든 그의 신체는 약해지고 있고 그의 건강이 이전보다 좋아질 가능성은 없다. 퇴직한 후로 사회적인 최소한의 권력도 잃었다. 이제 그를 찾아가는 제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본래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고립되었다. 틀림 없이 그는 자신이 가졌던 건강과 권력, 몸과 마음이 모두 강했던 시기의 일을 계속해서 회상하고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실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늙고 늙은 남자의 속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까, 하지만 이런 가설을 세워보고 나니 혐오 대신 연민이 찾아와서 내 마음이 편하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한 주 동안의 메모.

1. 시

 소풍을 가야지
 고독한 질주와 아이들의 붉은 눈물을 위해
 진지한 슬픔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을 위해
 가야지

 소풍을 가야지
 절뚝이는 맨발을 끌고
 맨발의 빛나는 상처를 흘리며
 가고 또 가야지

- 조동범 <풀밭 위위 식사> 마지막 두 연


2. 시

푹 삶아지는 게

삶의 전부일지라도,

찬물에 똑바로 정신 가다듬고는

처음 국수틀에서 나올 때처럼 꼿꼿해야 한다.

- 이정록 <국수 -어머니학교 2> 앞부분


3. 글쟁이

두어달전 동네오빠가 술을 먹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글쟁이로 이윤기 선생님을 꼽으면서 "이윤기는 남자 박완서지."라고 말했다. 잠시 멍해졌다. 어떤 위대한 여성에 대해 말할 때 쉽게 그 분야의 거장으로 알려진 남성의 이름을 빌려오기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에 뒤따른 설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윤기와 박완서의 문체에 대한 설명과 그 오빠가 두 분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경위를 근거로 보자면 정말 이윤기는 남자 박완서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생경하다.


4. 희망

탈핵 강연을 듣고. 알면 알 수록 절망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자포자기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편이 낫지 아니한가? 가장 괴로울 때에도 호기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 농담

동해안이 그 바다가 이 바다인데 해류가 돌아가는 화살표를 보니 그냥 같은 바다. 하지만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해수가 아무리 밀려와도 우리나라 해양수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윤진숙 장관님의 호연지기, 아무 것도 몰라도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강력한 추진력을 믿으면 된다.


6. 양성애

인간의 본능적 생식을 넘어서는 사랑의 능력을 다양하게 발달시킬 수 있는 계기 중 하나.


7. 2013년에 쓰는 전설

남자가 크게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묻기를 "너 처녀였니?"하기에 여자가 "아니오. 저는 결혼한 몸입니다." 하고 답하였더니 남자는 기뻐하며 제 양물을 단단히 곧추세웠다 하더라.


8. 유혹

정숙한 여자들은 유혹에 저항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실은 거부할만한 유혹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 재능

평범한 사람들만이 사랑을 안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들은 어떤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다가 곧 재능을 탕진해버린다.

ㅡ 캐서린 햅번의 말, 그녀는 사랑을 알았을까, 아니면 매력을 탕진해 버린 쪽일까?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은 많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 (김태희의 연기력이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10. 버스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할 때의 순서

엿보고 훔쳐보고 살펴보다 결국 뚫어지게 지켜본 뒤 눈을 감는다.


11. 사발식

예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군대풍의 사발식 같은 걸 좋아했던 과장님이 있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사발식은 싫었고 그래서 그 과장도 꽤나 싫었었다. 그러나 그 사람 아래로 사발을 비웠던 여자 직원이 나 하나 뿐이었기 때문인지 이후로 술자리에 자주 불려 나갔었다. 우리 부서도 아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 나름으로 여직원에게도 사발식을 거행하는 것은 양성평등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일할 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우리 팀장보다 공개적으로 아쉬워해서 민망했었다. 술을 퍼마시는 것은 남자들의 문화일까? 아니, 역시 이런 것은 알콜중독자의 습성인데 남성 중에 알콜중독자가 많을 뿐이다. 내가 술을 퍼먹는 이유는 술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남성의 문화에 편입되기 원했기 때문일까? ㅡㅡ 글쎄 모르겠지만 지금은 남자보다 술이 더 좋다.


12. 개

개는 빠르게 숨을 쉰다. 개의 가슴팍에 손을 대보면 빠르게 콩닥거린다. 보통 몸집이 작은 동물은 호흡수와 심박수가 빠르다고 한다. 인간의 심박수는 분당 60-80회인데 비해, 작은 쥐는 600회, 커다란 코끼리는 20회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대체로 느리게 숨쉬고 느리게 피를 돌리는 녀석들이 오래 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근거로 도교의 일부 종파에서는 불로불사를 목적으로 호흡수를 줄이는 수련을 하기도 한다. 나의 개는 빠르게 숨쉬고 바쁘게 피를 돌린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나보다 빨리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 슬프다.



불면에 대하여.

불면은 내가 어떤 비용을 치르든 갖고 싶은 바람직한 상태이다. 이른 아침에 전날 밤 동안의 몽롱한 반(절반)의식상태를 즉각 떨쳐버리고, 몇 시간 전에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탈환하는 것만큼 내게 기분 좋은 일은 없다. 나는 이따금 나 자신이 여러 흐름들의 묶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견고한 자아라는 것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정체성 - 보다는 이게 더 좋다. 이 흐름들은 내 삶의 주제곡처럼 깨어있는 동안 계속 흐르지만, 그것들은 최고의 순간에도 어떠한 화해도, 조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이탈'하고, 제자리를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언제나 움직임, 시간, 장소 속에 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기묘한 조합을 형성한 채, 반드시 전진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면서, 대위법적으로 그러나 중심주제도 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이게 자유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확신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회의 또한 내가 각별히 아끼고 싶은 주제의 하나이다. 내 삶의 수많은 불협화음과 더불어, 나는 반드시 올바른 것은 아닌 상태, 제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선호하는 것을 배웠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불면에 관한 글. <제자리를 벗어나서>의 일부. 녹색평론 130호애 인용된 대목을 읽었음.

결혼에 대한 고민.

1. 사랑과 복수에 대한 경구.

사랑은 앞을 보고 증오는 뒤를 본다. - 미뇽 머거클린


2. 간통죄

간통죄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나는 간통을 악덕으로 규정하는 건 공산주의적이라 말했다. 사랑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느냐, 나의 정절이 상대의 정절을 강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다.

친구는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이해가 단편적인 까닭이다. 친구가 사회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인지 아주 그럴듯한 설명을 듣고 내 말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 이유를 다시 쓰려니 어렵다. 여튼 공산주의는 관계의 공평함과 상관 없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친구는 반대로 간통죄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형벌이라고 설명했다. 사랑과 생식의 문제를 독점적 또는 일방적인 거래로 인정하고 계약의 위반에 대해 처벌하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보다 훨씬 멋진 말로 설명했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말장난은 거기까지였다. 간통죄의 형사 처벌은 다만 사적 복수심을 공적 형벌로 제도화한 것이라는 결론. 무슨 이데올로기에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복수심은 이념이 될 수 없으니까.

사랑이 공평한 분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믿음이 현재의 간통죄를 지지하는 근간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자족적인 감정이다. 사랑이 일종의 권리라고 착각하는 자들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 요즘 간통에 대해 생각하는 걸 보면 결혼할 때가 된 것 같다. 음...

+ 용이의 말

위통 치통 간통 으악, 두통엔 개보린정 간통엔 법정

+ 선배의 말

간통에 대해 생각하다니 결혼할 때가 아니라 이혼할 때가 된 거 아니야?


3. 위기감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알아채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끝나는 순간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랑이 사그라들 때는 최선의 노력으로 감정을 죽이는 편이 낫다. 천천히 진행되는 감정의 소모는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4. 외로움에 대해

결혼을 하면 권태감과 싸우게 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면 존재의 본질적 고독과 싸우게 된다. (물론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도 많다.)

이 말에 대해서 결혼한 선배언니가 밝혀준 결혼의 실상 "결혼을 하면 권태감과 싸우면서 배우자랑 싸우고 그 때문에 환기된 존재의 본질적 고독과 싸우게 되지. 배우자 마저 남이고, 남 맘은 내맘같지 않다는 걸 느끼는 데서 오는 본질적인 고독."

그렇구나.



2013년 6월 12일 수요일

복수라는 이름.

갑자기 목포에서 전화가 왔다. "복수언니가 네 주소를 알고 싶다는구나......" (중략) 처음, 난, 정말 놀랐다. 복수언니 이름이 복수라는 것이 아닌가. 목포언니가 살며시 말해주었다.

딸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우린 그 딸에게 '복수'라는 이름을 부여한단다.

ㅡ 여지선, 문학, 그림을 품다, 푸른사상, 2010, p.39.

사촌동생의 군복무와 군견 훈련.

지난 일요일 저녁, 군복무 중인 사촌동생이 휴가 나왔다고 집으로 놀러왔다. 나보다 꼭 열 살 어린 녀석이 벌써 군인 아저씨...; 이 친구는 공군에서 군견 돌보는 일을 한다고. 쉐퍼드랑 골든 리트리버 애들이랑 같이 군복무라니 멋진 경험이겠다... 하지만 역시 군복무이기 때문에 당사자가 느끼기엔 전혀 멋지지 않다고 한다. 담당하는 개를 돌보고 훈련시키다 보면 정이 많이 들어서 제대할 때 아쉬워하는 병장들도 있지만, 개를 보러 다시 찾아오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ㅡ 동생이 추임새를 넣었다. 제대하고는 부대 향해서 오줌도 안 눠. 라고.

군견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사촌동생은 그 문제가 불거지게 된 원인을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입을 잘못 놀린 장교의 책임으로 돌렸다. (편협한 시각이지만 사병으로 복무하는 입장에선 당연할 것이다.) 지금은 군견으로 복무하다 퇴역하는 개들을 어디로 보내는지 물어보았는데 이 아이가 복무하는 동안에는 아직 퇴역한 군견이 없어 모르겠다고 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서로에게 행복한 사랑이라는 강력한 교류와 친밀감을 모르고 인생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놓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느끼고, 그로 인한 실망감 때문에 질투나 압박감, 잔인성을 띠게 된다.
 ㅡ 버틀란드 러셀
그래서일까, 애정의 밀도가 낮은 사람은 두렵다.


조언.

조언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지만 특히 곤란한 분야는 종교와 결혼 문제이다. 사후세계든 현재의 상황이든 개인의 의지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고통을 견뎌낼 수 있도록 위로해줄 수 있을 뿐이다.

황이리 선생님과 함께하는 가죽공예 수업.



딴지 벙커원 문화센터 황이리의 가죽공예 수업

어제 첫수업으로 가죽 스트랩 열쇠고리를 만들었다.
오렌지색 베지터블 가죽에 새파란 색선으로 엣지 있게 마무리했다.
내가 만든 거라 그런지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예쁘다. ㅎㅎ

첨에 수강신청 할 때는 수강생이 열 명 안 되어서 폐강되면 어쩌나 걱정 했었는데,
아니 이게 웬걸 스무 명이 넘는 수강생이 몰려와서 북적거렸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는 오전반 오후반 나누어서 수업하기로 했다.
오전오후반을 나누니까 초딩 때 생각이 난다. 비록 나는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오후 수업은 2시부터 5시까지, 나는 오후반 수업을 듣기로 했다.
늦게 일어나는 새인데 아침수업이 부담스러워 신청하지 못한 사람은
오후반에 빈 자리 있냐고 벙커원 매니저에게 문의를 하거나
빈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보도록 하세요.

수강생 중에 손이 빠르고 재주가 좋은 분들이 여럿 있더라.
그렇다면 실습작품을 만들고 나서 남는 시간에 추가 작품을 만들어서
딴지마켓을 통해 제품을 판매해보자고 황이리 선생이 말씀하셨지.
수익금이 생기면 모아서 장흥 치유센터로 보내자고 하셨어.

수강생들 입장에선 연습도 해보고 재능기부도 하고
마켓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수공예 상품 들어오니 좋고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즐겁게 후원하는 방식이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어서 좋은 연대로구나!
황이리 선생님께 박수를...!

나도 열심히 수련을 해서 예쁜 물건을 만들어 낼게.
내일은 카드 지갑을 만들 거야. 히히~

2013년 6월 9일 일요일

조세피난 또는 탈세은닉.

* 조세피난처: 'tax haven'을 옮긴 말, 국가의 정당한 과세를 재난으로 보고 탈세를 피난으로 표현하는 괴상한 말.

* 조세회피처: 한겨레 등에서 사용하는 말, '회피'는 '피난'보다 중립적이지만, 불법적인 금융거래를 마치 합법적인 틀 안에서 납세액을 줄이는 방법인 양 미화시킬 수 있음.

* 조세도피처: 선대인 소장의 제안, 행위주체가 적극적으로 과세를 피해 도망하는 것이라는 본질적인 범죄의도를 포함하는 말. (선대인 경제연구소)

* 탈세은닉처: 내 생각에는 이 표현이 딱인데, 언론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곧 밝혀질) 범죄사실을 단정해서 쓸 수는 없겠지.

2013년 6월 8일 토요일

무작정 여행기 9. 팬덕후가 간다.




10월 22일, 팬덕후가 간다

밤기차에서 잠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다시 잠들지 못했다. 기차는 정시 도착 5시 9분. 청두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아직 깜깜했다. 역 앞의 유료화장실을 이용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수로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칸 별로 배수관리 설치된 게 아니라 전체를 흐르는 수로로 배설물이 흘러가는 형태다. 화장실에 가득찬 자극적인 냄새에 잠이 다 깼다. 중국에 온 지 며칠만에 처음으로 대륙풍 화장실을 경험하고 놀랐다. 십여 년 전에는 대도시에서도 흔했는데 이제 이런 형태의 화장실은 사라지는 추세인 것 같다.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체험한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짐보관소는 6시에 문을 연다고 적혀 있었는데 30분 일찍 문이 열렸다. 짐보관소 앞은 여행사 사무소였다. 새벽부터 인근 지역 투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10원 내고 바코드 스티커 붙은 영수증을 받아왔다. 당일출발인지 물어보는 거 보니까 하루 지나면 추가요금이 있는 모양이다. (중국어로 짐보관소는 行李房-싱리팡) 나는 저녁에 밤 기차를 타고 떠날 예정이다. 중국 동부에서 남서부 끝인 윈난성 쿤밍으로 갈 길이 멀었다. 쓰촨성의 청두에 들른 이유는 오직 팬더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천성은 팬더의 고장! 중국에는 팬더가 약 1,600마리 있는데 그 중 1,200마리가 사천성에 살고 있다. 특히 청두 시내에서 동북쪽에 있는 '팬더번식연구기지'는 세계 최대의 팬더 생태공원으로 일반인도 관람을 할 수 있다. 언젠가 인터넷으로 이곳의 사진을 본 뒤에 여기는 꼭 가보아야겠구나 다짐했었다.

드디어 팬덕후가 간다. 팬더님 기다려줘!


내 아이폰과 노트북에는 웹서칭으로 모은
팬더 사진과 그림이 수백장 저장되어 있다.

여권 커버에 팬더 스티커를 붙여놓기도 했다.

길가다 팬더 인형을 보면 지나칠 수가 없고

포장의 팬더 그림 때문에 맥주를 충동구매하기도 했으며
  
팬더 캐릭터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청두에서 열리는 경제포럼 사이트 같은 곳을 뒤지기도...

길치는 어딜 가도 길치

당일치기 팬더투어니까 헤매지 않기 위해서 시안의 유스호스텔에서 인터넷으로 미리 지도를 찾아보았다.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기차역에서 9번 버스를 타고 동물원 정류장에서 하차, 87번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하지만 가는 길이 어렵지 않다고 해서 모두가 그 길을 쉽게 가는 것은 아니다. 길치라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미리 지도를 찾아보고 약도를 그려놓고 버스번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어도 그렇다.

기차역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시내에서 동북쪽의 부두산 인근으로 가야하니까 차량 진행방향을 보아하니 기차역 건너편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기차역 맞은편은 삼거리에서 일단 정면으로 가로질러 가봤다. 청두대주점에서 조금 더 지나 나타난 버스정류장엔 9번 버스가 목록에 없었다. 길을 돌아와 서쪽으로 가보았다. 여기도 없었다. 이 정류장도 아닌가보다 하며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니 버스정류장 자체가 없었다. 인근에 시장이 있는 모양으로, 엄청난 지게짐을 진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청두역은 지하철 공사 중이라 인도를 군데군데 막아놓아 걷기가 불편했고(2012년 10월 말) 청소원의 경쾌한 비질 덕분에 도로에는 먼지가 가득 피어 올랐다. 출근시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먹을 것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전거 수레에서 바오즈를 몇 개 사먹으면서 길을 물어보니 기차역 근처로 다시 가라고 했다.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보니, 역을 등지고 오른편에 거대한 규모의 버스정류장이 있았고 각지로 떠날 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길을 잘 모를 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리를 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묻는 편이 낫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본다.

그리하여 역에서 나온지 한 시간 만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청두기차역(북역) 나와서 오른편으로 꺾어지면 바로 버스정류장이 있고 9번을 타면 된다는 것이다. 간신히 버스에 탔으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멍때리다 종점까지 가버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새벽 시간이라 시 외곽으로 나가는 길은 뻥 뚫려 있어서 시 외곽의 종점까지 오는데 한 시간도 안 걸렸다. 물론 버스가 빨리 달렸기 때문에 내가 내릴 정류장을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종점에서 회차하는 버스로 갈아타고 동물원 정류장에 내린 시간은 7시 40분,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87번 버스를 갈아타려고 기다렸는데 대나무 모양으로 장식된 미니버스가 왔다. 차 외관도 대나무로 만든 것처럼 꾸며져 있었고 내부의 의자며 손잡이도 같은 것도 대나무로 장식되어 있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두근두근 설레고 말았다. 팬더기지에 도착한 시간은 8시 7분이었다. 그렇게 오래 헤맸는데도 너무 일찍 도착했구나 생각했는데 벌써 티켓팅하고 입장하기 시작했다. (8시 개장)


팬더번식연구기지
大熊猫繁育研究基地 /dàxióngmāo fányù yánjiū jīdì/
(현지에서는 팬더기지/따슝마오 지디/라고 줄여서 부른다.)
사천성 성도에 있는 세계 최대의 팬더생태공원
청두기차역(북역)에서 약 10 km 거리로 시내에서 가깝다.

*버스로 가는 방법
기차역에서 나와 오른편으로 꺾어지면 바로 버스환승센터 같은 대형 정류장이 보인다.
火车北站公交站西 정류장에서 9路 버스를 타고 动物园에 도착(팬더기지와는 다른 동물원)
진행방향 바로 뒷쪽에 있는 三环路川陕立交桥南 정류장으로 1분 정도 걷는다.
대나무 모양으로 장식된 미니버스 87路로 갈아타고 熊猫基地 정류장에서 내린다.
버스로는 1시간 이상 걸렸다. 택시를 이용한다면 30분 정도 걸릴 듯.


개장시간 08:00~17:30

입장요금 58元

주소 中国四川省成都外北熊猫大道1375号
홈페이지 (중국어, 영어, 일본어 제공) http://www.panda.org.cn/


팬더기지를 상징하는 엄마팬더와 아기팬더 동상

이 정도 거리에서 직접 팬더를 볼 수 있다.

팬더의 일상

기지 안으로 들어가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관광객은 중국인보다 외국인, 특히 외국인 단체관광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잘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과 함게 걷다가 인파가 울렁울렁하는 곳에서 멈춰섰다. 그곳에는 귀여움을 온 몸으로 내뿜으며 눈 가리고 잠을 자는 자이언트 팬더님이 있었다.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가 찰칵찰칵찰칵 소리를 냈다.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팬더님이 잠을 깨면 어쩌나 했는데 절대 잠에서 깨지는 않더라.


햇살이 눈부셔 눈 가리고 늦잠 자는 팬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

그리고 다시 눈 가리고 잡니다.


사육사는 어제 먹다 남은 대나무를 치워주고 새 대나무 갖다주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몸놀림을 보면서 나도 이곳의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육사가 무슨 일을 하든 말든 판다들은 그냥 여기저기 널부러져 잠을 자고 있었다.


대나무를 정리하는 사육사
대나무 위에 누워 잠을 자는 팬더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자는 팬더

난간에 몸을 널어놓고 자는 팬더

엎어져서 자는 팬더

드러누워 자는 팬더

옆으로 누워 자는 팬더

나란히 누워 자는 팬더

잠자는 팬더들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잠시 뒤척하는 정도의 움직임 만으로도 그 뭉그적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팬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쳐 다시 눕기라도 하면 사방에서 카메라가 몰려 들었다. 느릿느릿한 팬더의 속도에 익숙해져 가던 중에 꽤 빠른 속도로 활기차게 나무를 올라가는 팬더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딛고 서서 한동안 물끄러미 줄기를 바라보더니

팔을 뻗어 나무줄기를 끌어안고 영차~

팬더가 나무를 타고 올랐다.

나뭇가지가 휘청휘청 흔들려도 굴하지 않고

다음 가지를 딛고 올라섰다.

으라랏차 고지가 멀지 않았다.

팬더는 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팬더의 나무타기


팬더는 아주 느리게 어기적어기적 움직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팬더의 무게 때문에 나무가 흔들거렸다. 팬더는 씩씩하게 앞발로 둥치를 끌어안고 뒷발로 몸을 지탱하며 나무를 올랐다. 그리고 가장 높은 나뭇가지에 도착하자 자리를 잡더니, 잠을 잤다. 팬더가 나무에 올라가는 이유는 바로 잠을 자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주변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자는 팬더가 한 두 마리가 아니었다. 원래 팬더는 야행성 동물이기 때문에 낮에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잠을 자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나무 위의 팬더.jpg

나무 아래에도 팬더가 있었네!

나무 위의 팬더 두 마리

팬더가 자라는 나무

이 녀석들은 높이 올라가려는 야망이 없는 모양.

팬더가 잠자고 공작새가 뛰노는 낙원의 풍경!

하루 종일 관찰해본 결과 팬더의 일상은 크게 두 가지 과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잠을 자는 것이고 둘째는 밥을 먹는 것이다. 먹거나 자거나, 팬더의 일과는 이것이 전부인 듯. 이 단순한 일과를 위해 계획을 세우거나 조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잠자다 밥을 먹어도 좋고 밥을 먹다 잠이 들어도 좋다.


누워 있던 팬더가 일어나 밥을 먹기 시작하자

밥을 먹던 팬더가 대나무를 던지고 엎어져 버렸다.

잠을 자는 팬더 사이에로 밥을 먹는 팬더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팬더의 약력을 써 놓은 안내판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어 팬더의 이름과 나이 등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대나무 줄기를 씹고 있는 녀석의 이름은 치전(奇珍:귀한 보물이란 뜻), 1999년 9월 4일 생이고, 엄마의 이름은 메이메이라고 했다. 치전은 메이메이가 처음으로 낳은 새끼였는데, 첫 출산에 놀란 엄마가 아가를 돌보지 않아 사육사가 대신 돌보았다는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치전이 대나무를 먹는 방법

대나무 줄기를 가지런히 모아 쥐고서

한 입에 쏙 넣어 우적우적 먹어요.

팬더와 나 사이의 거리는 3미터 정도. 대나무를 추스르는 차르륵 소리, 우적우적 입에 넣고 씹는 소리, 이빨이 부딪히는 끽끽 소리가 다 들렸다. 팬더는 대나무 잎이나 줄기, 죽순 외에도 잎채소나 과일 류를 다양하게 먹는다. 아무래도 매일 먹는 댓잎보단 당분이 높은 과일을 더 좋아해서 사육사과 팬더를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하려고 사과를 주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팬더가 대나무를 바삭바삭 씹어 먹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보고 있자니 대나무가 맛있을 것 같았다.


이파리를 선호하는 팬더군

줄기만 남기고 댓잎만 훑어먹습니다.

수북한 대나무 가지 위에 올라 앉아 우걱우걱

팬더는 열심히 대나무 잎을 먹습니다.

팬더 마다 식성이나 취향, 음식을 씹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도 신기했다. 어떤 팬더는 굶주린 것 같이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대나무 줄기를 입에 밀어 넣었던 반면, 다른 팬더는 대나무 이파리를 여러 개를 이빨로 훝어서 입에 물고 난 뒤 한손으로 움켜쥐고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뜯어 씹어먹었다. 또 줄기를 먹을 때는 대나무를 앞발로 집어 껍질을 이빨로 씹어 벗겨내고 속심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녀석도 있었다.


팬더 마다 대나무 식성이 다른 듯

파란 댓잎이 아니라 갈색 대나무 줄기를 먹고 있었다.

이 팬더는 대나무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줄기 속심을 질겅질겅 씹어 먹었고
이 녀석은 댓잎을 정성스레 따 모은 뒤
우아하게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맛있는 건 나눠 먹으면 더 맛있지~

팬더들의 점심식사

팬더는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먹는 동물은 드물 것이다. 소처럼 꾸준히 우직하게 먹더라. 그런데 열심히 씹어 먹다가 갑자기 멍 때리는 순간이 있었다. 마치 일시정지 버튼 누른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는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멍하니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우물우물 씹는 행동으로 돌아온다. 왜일까?

귀여움 대폭발 아기 팬더

팬더연구기지의 팬더인공수정실에서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팬더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지의 중심부에 한 곳이 있고, 산 위로 올라가서 구름다리로 연결된 지역에 또 한 곳의 보육시설이 개방되어 있었다. 아가들을 24시간 보살피는 시설은 아니고 정해진 시간에 데리고 나와서 잠시 보여주었다가 들어갔다. 아기 팬더가 없는 시즌이라면 문을 닫아둘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태어난지 40~60일 정도 된 아기 팬더들을 볼 수 있었다.

두꺼운 유리 벽 너머로 아른아른 아가팬더가 보인다.
엉덩이에서 귀여움이 폴폴

머리에서도 귀여움이 물씬

아가 팬더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좌뒹굴 우뒹굴

조금 자란 아기들은 아기 침대에서 잡니다.

아가팬더 둘이 뭉치면 귀여움이 두 배

아가 팬더 셋이 뭉치면 귀여움이 세 배...?

아니, 대 폭발

꼬물꼬물 귀여워!!!

막 검은 얼룩이 생기기 시작한(생후 1개월 쯤부터 생김) 아기판다님이 발가락만 꼬물 하면 남여노소 외국인 내국인 할 거 없이 모두가 꺅꺅꺅 정신줄 놓고 기뻐했다.


사육사가 아가를 얼르고 달래다가

갑자기 유리벽 앞으로 데려와 보여주었다.

자식 자랑하는 엄마 포쓰 사육사

하지만 역시 대륙의 기상은 숨길 수 없는데

귀한 아기 팬더를 안으로 데려갈 때
플라스틱 정리함에 넣어서 들고 가더라.

아기팬더를 볼 수 있는 육아실에서 나오면 바로 기부금을 내는 곳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귀여워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아가들을 보고서 멘탈이 젤리같이 말랑말랑해진 사람들이 지갑을 부드럽게 열도록 유도하는 대륙적 설계였다. 나 역시 없는 살림이지만 기꺼이 지갑을 꺼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 현금 5천위엔, 한화로 100만원 가까이 되는 거액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미는 할아버지를 보고 기가 죽어 버렸다.

이렇게 거액을 기부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서 일행인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무려 '닥터' 클리포드 버클리 할아버지는 평소 환경문제와 멸종되는 동물들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텍사스에 살고 있는데 이번 여행을 떠나면서 기부금을 미리 준비해왔다고 한다. 연구기지에서는 고액 기부자에게 기념티셔츠와 공로상장을 주더라. 기부자 명단에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이름이 많이 눈에 띄었다.


본토의 마파두부

팬더연구기지에는 자이언트팬더(따슝마오)만이 아니라 래서팬더(샤오슝마오, 레드팬더)가 사는 지역도 있었다. 그런데 12시가 가까워지니 배가 너무 고파서 래서팬더는 식후경으로 미뤄두었다. 한국에선 래서팬더님을 영접하기 위해 매년 과천의 서울대공원까지 갔었는데, 이제 뒷전이 되었다.


팬더기지 안, 호수공원 근처에 자리잡은 대나무식당.
실내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계속 팬더 영상이 나왔다.

팬더기지 안에 있는 대나무 식당에 들어갔다. 아무런 기대를 안 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관광지 식당이니 맛 없고 비쌀 거라 예상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대충 한 끼 먹자는 기분으로 들어 갔지만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마파두부 한 접시(28위엔)에 쌀밥 한 공기(2위엔)를 시켰는데,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이제까지 먹었던 마파두부의 맛을 싹 잊어버리게 되었다. 한국의 마파두부가 본토와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중국 동부의 도시에서 먹어본 것과도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이것이 진짜 마파두부

밥은 커다란 나무통에 내와 알아서 떠먹으라고 한다.

고추기름과 두반장으로 조미한 끈끈한 양념이 범벅된 두부요리가 뭐 특별할 게 있을까 싶지만, 맛의 비밀은 양념 속에 있었다. 사천요리를 대표하는 매운 맛을 설명하자면 시원하게 매운 맛이라고나 할까. 지독하게 매워서 얼얼하고 짜릿하고 맵싸하지만 먹고 나면 입안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사천요리의 3초(추)로 고추, 후추, 화초를 꼽는데, 그 중에 특히 화초 향이 강했다. 고추와 후추가 수입되기 전에는 화초와 생강이 매운 맛을 내는 주요 향신료였다고 한다. 원조 매운맛 화초가 투하된 이국적인 양념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혀에 감겼다.

차는 메밀인지 뭔가 볶은 곡물 맛과 구수한 향이 나는 것이라 매운 음식에 곁들여 마시기 좋았다. 게다가 전기 콘센트가 개방되어 있어서 아이폰 충전도 가능했다. 식당에 설치된 대형화면으로 팬더에 대한 다큐멘터리(무려 영어더빙)를 보면서 재충전을 했다. 어쩌면 여기 저녁 먹으러 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밥을 먹다가 맞은편에 아기를 데리고 온 한국인 부부를 발견했다. 쌀밥을 빨리 갖다 달라 하는 거 보고 한국인이구나 알았다. (중국에선 요리를 먼저 서빙하고 미판을 가장 나중에 내온다.) 부부는 어린 아기에게 밥을 먹이느라 고생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유모차 끌고 아기 짐보따리 들고 돌아다니는 것도 고생이겠지. 하지만 가족이 같이 왔다는 게 좀 부러웠다.

팬더기지 안의 호수

큼직한 잉어와 청둥오리, 검은 백조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백조 따위...

공작 따위, 새 따위...

점심을 먹고 난 뒤 슬슬 걸어서 백조호수와 장미정원을 둘러보았다. 대숲을 주류로 조성된 산책로는 아름다웠지만, 나의 목적지는 래서팬더 서식지였다. 백조의 호수 따위 스르르 지나치고, 바로 옆까지 다가오는 공작새도 본 체 만 체 했다. 너희도 다른 동물원에서는 주인공이겠지. 하지만 여기는 팬더월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새 따위가 팬더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래서 팬더의 왕림

래서팬더가 서식하는 지역에는 울창한 숲 속으로 관람객이 산책할 수 있는 통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철망 너머 아주 가까이에서 래서팬더를 볼 수 있었다. 자이언트 팬더는 중국 남서부의 사천성 일대 습한 지역에서 주로 사는 반면, 래서 팬더의 서식지는 멀리 티벳, 네팔 접경지대에 걸쳐있다. 보통 자이언트 팬더는 대나무 잎, 줄기, 죽순등 식물만 먹지만, 래서팬더는 대나무 잎과 죽순을 먹고(입이 작아서 줄기는 못먹는 모양) 과일이나 다른 나뭇잎도 먹고, 곤충, 새알, 심지어 작은 새까지 먹는 잡식동물이라고 한다.


래서 팬더를 보러 가는 길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길래 봤더니

저기 나무 위에 무엇인가 귀여움이 포착

귀여움으로만 따지면 자이언트 팬더에 지지 않는다는 래서 팬더

녀석들도 팬더인지라 하루 일과 중 절반은 잠

나머지 절반은 밥

밥그릇에 담긴 음식을 챱챱

마침 밥 시간인지 떼로 모여 챱챱


래서 팬더 역시 팬더님이라 밥을 챱챱 먹거나 잠을 쿨쿨 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이언트 팬더가 대형의 귀여움이라면 래서 팬더는 강아지형으로 축소된 귀여움의 소유자. 그런데 갑자기 내 발치로 귀여움이 스스슥 지나갔다.

내 발치를 서성였던 그 분


래서 팬더의 왕림



친구 따라 나선 래서 팬더 2


얼음땡 놀이를 할 때 처럼, 얼음! 되어서 꼼짝도 못 했다. 이렇게 귀여운 존재가 나와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다니! 자세히 보니 산기슭을 따라 난 관람로의 철망이 군데 군데 끊어져 있어 팬더들이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것이었다. 후다닥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느릿느릿 뒤뚱뒤뚱 제 속도 대로 걸어다녔다.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면 잠시 멈춰 서기도 했다가 한동안 멍때리고 앉아 있다가는 다시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며 걸었다.

래서팬더 구멍
요기로 막 지나다님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래서 팬더가...
귀염 돋는 뒷태를 보라!


팬더번식연구기지의 실상

팬더기지의 시설물은 중국 전역의 관광지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적하게 거닐 수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대나무와 수목화초가 어우러진 화단이 가꾸어져 있었다. 월월죽, 금죽, 금상옥죽 등 다양한 종류의 대나무를 심어 놓은 화단에는 대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설치되어 있었다. 부지의 규모가 아주 넓기 때문에 걷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주요 지점을 연결하는 셔틀 전기차도 운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에서 호텔이 아닌 공용 화장실에 (작동되는) 비데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세면대에 따듯한 물도 나오고 물비누도 있고 종이타월과 핸드드라이어도 있으며 핸드크림도 비치되어 있었다. 뭣보다 화장실에서 냄새가 안 났다. 아무래도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그런지 특별히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한적한 대나무 숲 산책로

팬더가 좋아하는 습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름다리
  
팬더 전기차를 타고 팬더를 보러 갑니다.

팬더기지에는 팬더의 서식지를 관람 외에도 몇 가지 볼거리가 있었다. '동물병원'이란 이름으로 팬더가 아플 때 쓰는 약과 수술도구, 팬더 몸에서 나온 기생충과 팬더 뼈 모형을 전시하는 건물도 있었고, '팬더주방'이라고 음식을 손질하는 건물도 있었다.

그 중 작은 영화관 시설에서 팬더 스토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고 있어 들어가보았다. 영화에 따르면 암컷 팬더는 교미를 한 뒤에 82~200일 정도 뒤에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심지어 임신하고 300일이 지나서야 출산한 경우도 있다고. 뭐 이리 개체 차이가 큰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언제 나올지 모를 아기를 기다리며 사육사는 항시 대기한다고 한다. 태어날 때 팬더의 몸무게는 엄마의 1/1000 정도로 약 500g에 불과하지만, 1개월이 되면 1킬로그램쯤이 되고, 6개월이 되면 이제 혼자 움직이고 대나무도 먹기 시작한다고. 여기까지 나오고 청두팬더기지를 소개하더니 갑자기 영화가 끝났다. 중간부터 보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다시 처음부터 영화가 재생되었다. 그런데 첫 장면이 팬더가 괴성을 지르는 섹스신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한 영혼을 가진 죽지않는돌고래 기자가 마사오의 마수에 사로잡혀 시작한 실전 일본어 교육방송 <아부나이 니홍고>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아기는 어떻게 태어나?" 그러자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뚝뚝하게 외쳤다. "섹스다요, 섹스." 이 대목은 반드시 죽돌의 육성으로 들어야만 한다. (아부나이 니홍고 듣기!)

그렇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귀엽고 보송보송한 아기 팬더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암수의 교미가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그러니 이 영화에 팬더의 섹스신이 삽입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헌데 영화의 편집이 퍽 당혹스러웠다. 암컷이 발정이 나서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를 흔들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보여준 뒤 화면이 푸른 벌판으로 넘어가고 "팬더는 매일 10-14킬로그램의 대나무를 먹는다"는 식생활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수컷 팬더가 꾸에에에 소리를 지르면서 암컷의 뒤를 쫒고 암컷은 도망가다 못이기는 척 하더니 씰룩씰룩 어울려서 교미를 하는 장면이 이어지고... 도무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는 영상편집이었지만 몰입도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다시 팬더 사육장을 기웃대던 중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두 마리의 팬더가 레슬링을 하는 것이었다. 체급이 다른 플레이어가 참여하여 승부욕을 발휘하지 않으면서도 헉헉대며 최선을 다하는 레슬링 경기를 두고 생활체육의 영역에서는 애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것은 바로 팬더의, 섹스다요, 섹스? 아까의 영상으로 인해 팬더표 음란마귀가 씌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별로 움직임이 많지 않은 팬더의 생활체육을 목격하다니 신기했다.

스멀스멀 접근

툭툭 건드려보더니

목덜미를 부비적 부비적

상대가 고개를 돌려도 굴하지 않고

은근슬쩍 뒤로 접근하더니

자세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삐진 아이를 달래면서

또다시 슬그머니 더듬더듬

엉덩이를 보이자

덥썩!


이 녀석들, 대체 뭘 하는 걸까?
(렌즈를 가리는 몹쓸 손가락 죄송;)


팬더번식연구기지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팬더를 번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암컷 팬더의 가임기는 1년 중 2~3일 정도로 매우 짧고 한 번에 1~2마리 정도의 새끼만 낳기 때문에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연구기지의 성과는 대단해서 2006년에는 팬더 베이비붐이 일어나 무려 28마리의 아기 팬더가 무사히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실은 아니지만 팬더의 교미를 활성화하기 위해 연구기지에서 팬더가 교미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해 틀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팬더용의 몰래카메라 포르노인데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연구기지에서 팬더에게 교미하는 영상을 보여 주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팬더의 교미 영상을 촬영했던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 장면의 일부를 일반 관람객에게 학습자료로 보여주기도 하더라.

으리으리한 박물관 건물

전시물은 대부분 사진자료와 멀티미디어 기기들

연구기지에 딸려 있는 부속건물인 박물관은 멀티미디어와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보여주는 영상 중에는 영화관에서 본 내용도 있고, 식당에서 틀어주었던 다큐도 있었다. 또 일종의 게임 형식으로 인터랙티브하게 설계된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중에 발정난 암컷 팬더의 울음과 교미할 때 내는 소리를 들려주면서 그 소리를 따라해 보라고 유도하는 멀티미디어 학습프로그램이 있었다.

멀티미디어 학습 프로그램 중 성교육 대목

발정난 팬더 소리를 따라해봅시다.

팬더가 교미할 때 내는 울음소리를 들어보니 비오는 날 주차장 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칠판에 분필이 긁히는 소리 같이 임팩트 있는 대목도 있었고, 갈매기가 패싸움을 할 때 나는 소리 같이 웅장한 부분도 있었다. 이런 소리를 따라해 보라고 시키길래 나도 노력을 해보았다. 목소리를 녹음하고 나면 팬더의 발정난 울음소리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점수가 나왔다.

팬더번식연구기지에서 팬더를 유혹하는 소리를 배우다니 전주에서 비빔밥 비비기 기술을 배우거나 울릉도에서 오징어 말리기 부채질을 배우는 것과 같은 생생 현장학습이 아닌가. 나는 뭐든 배워두면 쓸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보는 성격이다. 하지만 발정난 팬더 울음소리 따라하기를 어디서 써먹을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오후 네 시가 지나자 비가 주척주척 내리기 시작했다. 무려 여덟시간을 돌아 다녔더니 기운도 없었다. 기차를 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그만 돌아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길치의 생존비결은 시간 여유를 넉넉하게 가지는 것이다. 또한 부슬비가 쉽게 그칠 기색이 아니라 길거리를 돌아다니느니 기차역에 미리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역시나 돌아가는 길도 조금 헤맸다.

올 때 버스가 판다기지 맞은편에서 내렸으니 돌아 가는 버스는 정문 앞에서 타면 될 것 같다는 합리적인 예상은 적중하지 않았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한참, 말도 안 되게 멀리 걸어서 좌회전하니 정류장이 하나 보이고 167번 버스가 동물원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도시에 동물원이 두 개 있는 건 아닐 거야 믿고 탔다. 이십분 쯤 가서 동물원 환승정류장에 도착하고 보니 아침에는 못 보았던 버스 종점이 근처에 있었다. 시 외곽의 주거지역으로 나가는 버스들이 이곳을 기점으로 하는 것 같았다. 바로 9번 버스로 갈아타고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비오는 거리의 붉음

중국에서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가 오면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쓰고 탄다. 그런데 이들은 어쩌면 이렇게 붉은 색을 좋아하는지 빨간 우비와 빨간 우산이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나라 동요에는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이런 노랫말이 있지만 이 동네에선 모두 빨갛다고 불러야겠다.

버스는 시내로 들어와 역 동쪽의 시장을 통과한 뒤 U턴해서 역앞의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오늘 새벽에 헤맸던 시장을 다시 보니 반가왔다. 차가 막히기 때문인지 버스 기사는 종착지로 가기 전에, 버스정류장이 아닌 시장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라고 했다. 소규모 상점이 품목 별로 밀집해 있는 모양이 꼭 예전의 동대문 시장 같았다. 사람과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지동차와 짐수레가 뒤엉켜 여기저기서 빵빵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질러댔다. 청량한 대숲을 거닐다 시내로 들어오니 정신이 없었다.

시장에서 역으로 가는 길, 오늘 새벽에 그나마 좀 덜 번잡한 시간에 걸어 보았던 길이라 헤매지 않고 찾아갔다. 다행이다. 만약 새벽의 기억이 없었다면 또 다시 코 앞의 기차역을 한참 찾아다녔을 것이다. 기차 출발시간을 걱정하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택시를 잡아 타고 100미터 정도 갔을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 번 정도 헤매야 한다면 새벽에 헤매는 게 낫겠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헤매는 시간도 젊을 수록 좋겠지. 그러니까 지금 헤매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아야지.

... 그렇지만 정말 하루에 한 번만 헤맸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길 잃고 헤매는 게 일상이다 보니 좀 피곤하다.

... 아무리 헤매더라도 팬더를 보았으니, 최고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