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토요일

내가 만든 나무 탁자.

무엇이든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아주 직접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회화나 문학, 신화 같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었으나, 그 속이 너무나 깊어 아무리 헤집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황이 지겹기도 했다. 현실적인 삶에서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기능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꼈다.

의복부터 시작했다. 천을 자르고 바느질을 했다. 옷과 가방을 수선했고 소품을 만들었다. 때로는 대바늘이나 코바늘을 들고 뜨개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물이 디자이너 부띠끄 제품 만큼 근사할 리는 없고 그 정도의 미적 성취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의생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을 익히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애착이 생겨버리면 객관적 평가와 무관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바느질과 뜨개질을 배우고 확실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예전부터 늘 좋아했다. 최근에는 채식으로 요리하는 일에 좀 더 진지해졌다. 두유가 유제품을 대체할 수 있고, 유부가 어묵을 대체할 수 있으며, 표고버섯이 붉은 살코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기존의 레시피를 수정해 나갔다.(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다 요리가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당면도 빠진 야채 볶음이 되었다. 찐 감자, 볶은 당근, 구운 마늘 같은 것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이쯤 되어버리면 요리라기보다 조리에 가까운 수준, 하지만 제철 식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해서 먹을 때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만족스럽다.

그 다음으로 주거 문제.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되는 경험이라도 가능할 텐데 어떤 현장에서도 여자 인부를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단 이론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대략의 건축구조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만만한 책이 보이질 않아서 실내건축기사 자격증 교재를 샀다. 단조로운 수험서를 통해 포틀랜드 시멘트의 응결에는 보통 4~6시간이 걸린다는 것, 코르크판이 흡음판으로 쓰일 뿐 아니라 단열판으로도 쓰이는 내장재라는 것, 콘크리트 중에 거푸집 속에 미리 자갈을 넣고 모르타르를 주입하는 프리팩트 콘크리트란 특수 자재가 있다는 것, 벽돌쌓기에는 네덜란드식 영국식 프랑스식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주로 네덜란드 식의 벽돌쌓기로 모서리에 칠오토막을 쓴다는 것, 미역 같은 해초류를 건물의 미장 재료로 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잡다한 지식을 써먹을 일은 전혀 없었다. 내 손으로 시멘트 한 포대도 구입해 본 적이 없는데 특수 시멘트의 종류와 사용법을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개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쓸모 없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인류 문명이 멸망할 때까지 벽돌이나 못의 규격 같은 단순한 사실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쓸모 없지만 결코 변하지 않을 안전한 지식을 쌓아가는 일은, 마치 희랍어를 배우는 것 처럼 유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공부가 전혀 쓸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천장에 곰팡이가 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결로현상의 원인과 대처방안을 알고 있어서 꽤나 위안이 되기도 했다. 비록 보수공사를 마친 뒤에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사는 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혼란과 공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수험서 한 권을 읽은 보람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건축 제도법을 다루는 다른 수험서를 읽고 있다. 제도용구를 사용하는 방법, 컴파스와 자를 이용해 직선을 2등분 하는 방법, 직각을 3등분하는 방법, 원에 내접하는 정삼각형을 그리는 방법, 반대로 삼각형에 내접하는 원을 그리는 방법 따위를 흥미롭게 배워가고 있다. 원의 면적을 동심원으로 2등분하는 방법은 오 분 정도 들여다 보다 넘겨버렸다. 자격증 시험을 볼 계획은 없으므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가볍게 넘어가도 좋다.

내 평생에 컴파스와 자를 이용해 이런 작업을 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T자와 먹줄펜을 들고 제도 작업을 하는 설계자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고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는 작가와 같이 멸종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에 수공구를 이용한 제도를 배워서 뭐에 쓰겠는가? 하지만 언젠가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상상해본다. 시골집 다락에서 그 집의 것이 아닌 설계도면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저 도면 오른쪽 하단의 표제란 정보를 찾아보고, 정투상도 읽는 방법을 회상하며 그 집의 모습을 상상해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도면이 이웃 누구네 집의 것인지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오래된 자료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제도법 공부는 한자 공부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최근에 시도했던 몇 가지는 가죽공예와 목공예이다. 가죽을 썰고 구명을 뚫고 바느질을 해서 소품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가죽제품을 수선하는 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이 작업은 손질된 재료를 구입해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측면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무두질하는 기술을 배워보고 싶다. 

담배케이스와 머니클립 세트

담배와 라이터가 쏙 들어가는 크기

머니클립은 단순한 구조


목공예는 가죽공예에 필요한 목타프레스, 바느질용 포니 같은 공구를 만들기 위해서 우연히 시작했는데, 이 작업이 가죽공예보다 재미있다. 게다가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트리머로 모양을 다듬고, 드릴로 구멍을 뚫어 조각을 연결하고, 사포질을 해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는 과정 내내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난다. 목재가 된 나무는 묵직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한참 손을 대고 있으면 부드럽고 따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평생 나무를 만진다면 참 좋겠다.



이것은 내가 만든 나무 탁자,
흔들리는 탁자를 뜯어낸 뒤 리폼한 것이다.




2013년 7월 26일 금요일

울음.

마음이 어지러워서 아무 것도 쓸 수가 없고 읽을 수도 없었다.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스크리브너라는 툴을 써보라고 권했다. 스크리브너는 정말 훌륭한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도구가 문제는 아니었는데.... 친구가 시키는 대로 트라이얼을 설치했다. 그래픽이 직관적이라 좋네, 왁구짜기 편리하겠네,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이 났다. 수화기 너머에 친구를 앉혀 두고 소리 죽여 뚝뚝 울었다.

이제 그만해야지.

2013년 7월 24일 수요일

가타리 읽기 세미나.


추첨제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분이 말했다. 가위바위보로 국회의원을 선출하자고. 그러자 다른 분이 농담을 던졌다. 가위바위보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겠네요.

정당정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기 있는 유명인을 영입하는 조직의 기획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비롯할 것이다. 그런 것을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거시정치에 대한 기대와 환멸은 모두 우리 내면에 각인된 국가주의가 만들어낸 것 같다. 구조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전에 관계망을 갖추는 편이 낫겠다. 우애와 연대로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지. 그래봐야 한 걸음이지만 모두가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아마도 진보일테지.

이진경 선생님의 노마디즘을 꽤 여러 번 들춰 보았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되는 듯. 현명한 해설자의 독백을 읽는 것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편이 낫구나. 초원의 여기저기에서 이 도시에서 벗어나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들은 성벽의 붕괴를 예언하거나 도시민을 위협하거나 가두어진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내면의 뜨거움을 널리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음악과 예술은 언제나 이런 목소리를 통해 퍼져나갔다.


개에 대해 말하기.

개를 특별히 사랑하는 태도가 비판받을 일은 아니지만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논거가 될 수는 없겠지. 다만 나는 개를 사랑합니다, 개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다 도축되는 것이 너무나 슬픕니다, 라고 고백할 수는 있겠다. 이러한 고백들이 모이면 어떤 울림이 생기고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까? 전략적인 설득의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개고기에 대한 혐오, 불결한 사육시설의 현황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사랑의 감정을 말하는 편이 나에게 나을 것 같다.



애정의 요소.

친밀감, 외로움, 의존성은 언제나 애정과 혼동된다. 그러나 애정에서 이런 감정들을 제거하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아마도 약간의 온기와 연민이 남아 있겠지.



2013년 7월 23일 화요일

바람과 비.

바람이 분다.
떠나야겠다.
비가 내린다.
살아야겠다.

- 내가 쓴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글이 조각나서 기억에 남아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기분이 그렇다.

의자와 책장에 대한 책을 읽었다.

1. 의자의 재발견, 김상규, 세미콜론, 2011. 

가구회사 디자이너,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으며 지금은 강단에 서고 있는 저자의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 의자와 인체공학, 대량생산 시스템의 영향, 실험적인 디자인의 의자들, 의자의 정치학에 대해서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야기를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의자와 신체의 관계, 인간의 자세, 노동과의 관계 등 의자의 인류학적, 사회사적 의미가 새롭게 보인다. 의자를 통해 인간을 보는 작업에 흥미가 없는 독자일지라도, 다만 순수하게 미학적인 관점에서 눈을 즐겁게 해 주는 풍부한 도판을 감상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만듦새가 좋은 책이라 만약 평점을 매긴다면 별 다섯 개에 하나 두 개 더 추가하고 싶다.



의자의 다리가 네 개라는 고정관념를 깨는 한 다리 의자, 앉기와 서기 사이의 동작을 지지해주는 구조이다. 서서 일하는 서비스업 노동자를 위해 제공한다면 좁은 공간에서도 효율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좋겠다. 




간결한 구조로 미니멀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울름 의자. 울름 조형학교에서 실제로 쓰였다고 한다. 같은 디자인의 의자를 지금도 자노타 사에서 생산하고 있는데 판매가격은 550달러에 달한다고 하니 의자 계의 고전 명품으로 인정받은 모양이다.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로 젖히는 버릇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흔들의자 겸용의 사각의자. 가볍게 뒤로 젖혀 흔들흔들 즐기다 보면 다시 정자세로 돌아오기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재미있는 디자인이다.









2. 세상 모든 책장, 알렉스 존슨, 김미란 옮김, 위즈덤스타일, 2013.

전형적인 형태에서 벗어난 다양한 책장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책장에 대한 블로그 (http://theblogonthebookshelf.blogspot.com)를 운영하고 있는 저자가 기발한 책장들을 소개한다.





사다리 모양으로 단순한 구조의 책장. 조금 불안해 보이지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지만 않는다면 안정적일 듯.




책 모양으로 디자인된 목재를 조립해서 책을 꽂아두면 책 더미를 만들 수 있다!



발트해의 자작나무로 조각한 세상에 하나 뿐인 책장이다.


높은 곳의 책을 쉽게 뺄 수 있게 계단 형으로 설계된 책장이다. 문짝 달지 않고 쓴다면 완전 편리할 듯.



책이 붕 떠있는 느낌을 주도록 만든 예술적인 구조의 책장. 하지만 빽빽하게 책을 쌓아두어서 빈 공간이 사라진다면 조형미를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정말로 공중에 떠 있는 모양의 책더미 선반도 있다. 책으로 선반을 가려버리는 디자인이 무척 재미있다.


캣워크 기능을 더한 멋진 책장!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 이란 제목의 작품. 읽지 않은 책의 무게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덧. 구글의 블로그 서비스는 아이폰과 조합이 좋지 않은 것일까? 이미지 삽입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몇 차례 수정해 보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저 모양으로 업로드되고... 아, 몰라. ㅠㅠ)

2013년 7월 22일 월요일

풋감.

땅바닥에 떨어진 덜 익은 풋감이 발에 밟혔다. 그렇게 시퍼렇게 으스러진 친구가 생각났다. 풋감이 아쉬웠다. 무더위 한 계절만 더 버텼다면 까치밥이라도 되었을 텐데... 물렁해져 쪼아 먹히기 싫었던 거로구나, 그래서 떠났구나. 

생명이냐 죽음이냐.

"진보적 자유주의? 19세기적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택할 것인 '자유주의냐 진보주의냐'가 아니라 '생명이냐 죽음이냐'입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아요. 다가올 미래가 지금까지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되풀이 될 거라 생각하는 발상입니다. 지금은 일시적인 후퇴일 뿐 경제성장도 계속 된다는 논리죠. 세계적으로 탈성장의 신호가 나오고 있는데 입만 열면 일자리 창출한다고 해요. 어떻게요? 전태일의 시대는 노동이 '착취'되는 시대였지만 김진숙의 시대는 노동이 '배제'되는 시대입니다."

김종철 선생님 말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87974&CMPT_CD=SNS0

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인내에 대한 조언.

참기 어려울 때는 그냥 참으렴. 참고 넘어간 뒤에 다시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 되는 때가 많단다. 사람들이 보통 모욕을 당했을 때 참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존재감이 훼손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거든. 하지만 그럴 때 참는다는 것은 결국 굉장한 존재감의 발휘란다. 

(물론 참을 필요가 없는 것까지 참게 되는 부작용이 있지.) 

성감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성감대는 뇌 안에 들어있다. 그것을 마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피부 표면의 감각은 다만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한강, 희랍어 시간.

한강, 희랍어 시간, 문학과지성사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긴 여자는 실어증의 재발로 직업마저 포기했다. 말하지 못하는 여자, 그래서 울지도 못하는 여자는 말을 되찾기 위해 가장 낯선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희랍어 수업, 여자는 집요하게 정교한 문법체계를 가진 고대의 언어를 바라본다. 그녀는 희랍어 문자, 그 형상들을 소리내어 읽을 수 없다. 

이야기는 다른 감각을 잃은 사람들의 관점으로 넘어간다. 청력을 잃은 여자 목수에게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희랍어 강사가 편지를 적어 보낸다. 눈이 멀어 가는 남자는 남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소리를 읽어내는 여자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는 열일곱 소년이었던 남자의 첫 사랑이었고 그는 자기의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린 뒤 여자와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여자는 남자를 거부했고 남자의 사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들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 남자는 침묵 속에 살아가는 여자에게 자신의 어릴 적 어리석음과 상실의 고통을 담담하게 털어 놓는다. 여자의 회신 여부는 알 수 없다.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 그들은 상실한 감각 때문에 아프다. 또는 아프기 때문에 감각기관을 잃었다. 

말을 잃은 여자가 잃은 것은 발성의 기능이 아니라 소통의 의지였다. 그녀가 세상에서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마지막 끈인 아이는 이혼하고 양육권을 가져가버린 남편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 마디도 항의하지 못하고 다시 침묵으로 가라 앉았다. 침묵 속에는 오랜 증오와 고통이 가득차 있었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여자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언어인 희랍어로 글을 쓴다. 땅에 누워 있는 여자, 죽어버린 또는 죽음을 기다리는 여자에 대한 시.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는 여자의 희랍어 시에 자연스레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의 마지막 목소리인 희랍어 문자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여자는 도망쳤다. 남자는 여자를 따라가 사과했다. 남자는 여자가 침묵 속에 살았던 그의 첫 사랑 같이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자의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침묵하는 여자와 시야가 어두워지는 남자는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 희랍어 시간에 강사와 학생으로 만났고 일정한 거리를 두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들은 조금씩 변했다. 언어화되지 않은 미묘한 변화를 통해 조금씩 닮아갔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시각으로 식별해내지 못하는 남자는 현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절대적 이상-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설명한다. 그의 첫 사랑 귀머거리 목수 여자가 믿고 있는 선량한 신은 언제나 우리 인간들을 보며 슬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른 일곱 살에 죽은 그의 친구 요하임 그룬델은 죽음과 소멸에는 이데아가 없다고 단언했다. 영원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그는 다시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 이데아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욕망했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도 여자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남자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침묵 속에서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아냈다. 보르헤스의 말 대로 세계는 환이고 삶은 꿈일지도 모른다. 아른한 세상에서 외로운 영혼이 서로를 찾았다. 그것은 죽은 언어를 배우는 일만큼 덧없지만 문법같이 정교하게 진행되었으며 소통에 대한 갈망은 언제나 그렇듯이 절박했다. 



부부 사용 설명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요 네비게이션 아가씨다. 암만 길을 헤매고 다녀도 한 마디 싫은 소리 하는 법 없이, 이 길이 아니다, 다음 골목에서 돌아가라 알려주기만 하거든. 네비 다음으로 좋은 여자가 바로 늬 엄마다. 어느 길로 가면 된다고 알려 주진 않지만 길 잘못 들었다고 잔소리했던 적은 한 번도 없거든."

갈림길을 지나쳐서 한참을 지나가 유턴을 한 뒤 되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말씀. 울 엄마는 차멀미를 하기 때문에 차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어서 운전자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헤매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이번에는 "경로를 이탈했음다~"하는 네비양의 목소리를 듣고 아빠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 채고 말았지만, 잔소리하지 않는 좋은 여자란 칭찬 아닌 칭찬을 듣고 난 뒤에는 한 마디 잔소리도 없었다. 

"애 아바이는 생전 성을 내는 법이 없어요. 우리 둘이서야 투닥거리기도 하고 그라지만 친구들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성을 내거나 면박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얼마나 순하고 착한지 몰라."

가족모임 술자리에서 숙모의 말씀. 시댁식구들 앞에서 은근히 남편 흉을 보다가 불쑥 날린 강력한 칭찬 한 방. 그 술자리가 끝나기까지 숙부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면서 앉아 있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부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인가보다. 

2013년 7월 10일 수요일

이 블로그의 독자 통계.

구글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통계를 보았다. 의외로 외국에서 접속하는 독자들이 많다. 무언가 쓸모 있는 정보를 검색하려다 잘못 들어오게 된 걸까? 브라우저 사용에 대한 통계도 흥미로웠다. 크롬을 사용하는 유저들의 수가 절반 이상일 줄은 몰랐다. 모바일 사파리, 즉 아이폰을 통해 접속하는 유저들이 그냥 사파리로 접속하는 독자보다 많다는 점도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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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던 일들.

요즘 골프 강습을 받고 있다. 아직은 스크린을 향해 공을 제멋대로 날려 보내는 수준이지만 이러다가 재미가 생기면 산을 깎아 만든 잔디밭에 가고 싶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또한 가죽공예를 배우기도 했다. 채식을 시작하고 나서 가죽제품을 쓰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적도 있는데 내 손으로 가죽을 잘라 무언가를 만들면서 즐거움을 느끼다니 이상한 일이다. 녹색당원으로 이래도 되는 걸까 싶어 기분이 묘하다.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더 많은 충동을 느끼고 마는 것일까...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이야기가 각기 다른 화자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영혜의 남편은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의 변화를 관찰하고, 영혜의 형부는 그의 아내로부터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영혜를 갈망하며, 영혜의 언니 인혜는 완전히 미쳐버린 여동생의 마지막을 지킨다.

영혜가 왜 고기를 먹지 않는지, 어째서 악몽을 꾸는지, 그녀의 몽고반점은 왜 사라지지 않았는지, 온몸에 꽃을 그린 사람을 만지며 젖어버린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가 나무가 되려 하는 이유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영혜는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서서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물구나무선 채 햇빛을 쬐며 사타구나 사이에서 꽃을 피운다. 그렇게 그녀는 동물에서 벗어나려 한다. 나무가 된다.

채식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사실을 꽤 오래 잊고 있었다. 만약 내 아버지가 나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게 하려고 나를 때렸다면 나 역시 삶에 대한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 주위의 사람들은 나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자해하는 대신 상대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영혜는, 그 순하고 부드러운 여자는, 소통을 체념하고 이해받기를 포기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버렸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인간의 삶이란 이토록 슬프고 외로운 것이었다. 동물을 죽여 그 시체를 먹고, 다른 사람을 억지로 먹이고 보살피는 것, 또는 꿈을 꾸느라 잠들지 못하고, 나무가 되기 위해,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는 것.

여자는 비인간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녀가 자살했다거나 자기 삶을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가치 없는 소모가 인생의 전부라면 그것을 종결할 권한마저 빼앗아가는 일은 가장 무자비한 폭력이다. 영혜는 브래지어로 옭죄지 않은 자기의 젖가슴을 좋아했다. 젖가슴으로는 아무 것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종교와 순수와 탐미.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 엔도 슈샤쿠의 <깊은 강>이 떠올랐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지하철에 있었다. 책을 덮어놓을 수가 없는 대목이 연이어져 몇 개의 역을 지나치고 말았고 결국 통곡하듯 울었다. 그 날의 기분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작가 이름과 책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있을 법한 선배언니가 생각났다. 전화를 걸어 이러이러한 내용의 책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묻자 언니는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알려주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때 같지 않을 걸." 우리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도 언니가 이 책에 대해 비슷한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났다. 다시 보면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 작품은 실망스러운 쪽에 속할 것이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새로울만한... 것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깊은 강이 주었던 울림은 신과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다룬 흔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진지한 가톨릭 신자였고 범신론자였으며 깊은 강 처럼 흐르는 사랑 외에 어떤 물살에도 순응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엔도 슈샤쿠의 책에 담겨있난 신과 사랑은 미시마 유키오와 다니자키 준이치로 같은 일본의 탐미주의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는 종교색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색깔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밀도는 확실히 다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예에서 보듯 가장 자기중심적인 작가들의 유미적 태도에서 비롯한 종교적 열망이란 임시방편의 도피처와 같아 믿음직하지 않다. 분명히 기억나지 않지만 골드문트의 이야기에도 비슷한 메시지가 있었는데...
 
 

메모 또는 일기들.

1. 이익집단과 이념집단의 경계에서.

"목적의식에 부합하게
 당원만 늘이려 하고
 교인만 늘이려 하고
 조합원만 늘이려 하는
그런 마음 가짐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그렇게 만났으면 좋겠어.

사람 대 사람으로

그렇게 품어야 하겠지." - 권단
"가족주의는 야만의 최고봉입니다." - 황덕명

2. 엄마

카카오톡 메시지가 엄청 많이 들어와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모두 엄마가 보내신 것. 낮에 카톡으로 사진 전송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더니 엄마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을 보내오셨다. 울 엄마와 친구들의 스타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비슷해서 우리 엄마를 한 눈에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3. 6월 29일 경기당원총회를 마치고.

작은 역할을 맡아서 일을 해나가면서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지만 어쩐지 경험치가 쌓여가는 느낌이다. 훌륭하게 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샤워하다 말고 얼굴을 붉힐 정도는 아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 하는 믿음이 생겨서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다. 좋다. 삶의 안정감은 이렇게 쌓아가는 것일까?

4. 술먹고 토해낸 말들.

여전히 사랑이 필요하다. 오직 사랑만이 굳건하게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메말랐구나. 일하기 싫고 사람도 싫다. 나에게 솟아나는 사랑이 없다. 연민도 동정도 없다. 그러니 공정해져야 한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의 젊음이 노래하는데. 내가 환호할 이유는 없는데.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에렛의 단문을 읽듯이 나의 삶이 차분하게 읽힌다. 나쁘지 않다. 산길을 걷는 것처럼 느리게 걷는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돌뿌리 같이 그 골짜기에 두고 간다.

실존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살고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것들은 그들의 환상에서 기능할뿐이다. 관찰자는 어디에나 있다. 나 역시 세계의 삶의 고행에서 많은 환상을 품고 있다. 사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마귀의 꼬리와 거미줄의 엉킴이다. 굶어 죽은 개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의 글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필요로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버린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 오늘 쓰지 않으면 오늘 나는 죽어간다. 그외의 생활은 그저 논쟁과 산책과 어느 생명을 죽이는 일 또는 섭생과 관계할 뿐이다.

육체는 충만하고 감각은 부서진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을 정도. 가끔 그 높은 천정을 바라본다. 하늘은 높고 습하다. 부끄러운 계절이다. 장마로구나. 쓸모 없는 것들. 나. 또는 욕망. 부질없구나.

내 안에 문학이 있다면 이것이겠지. 내가 아는 삶 또는 내가 알고 있다고 믿고 천착하는 삶. 모두 거짓이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

문체도 사건도 인물도 문제가 아니다. 가장 괴로운 부분은 그 속의 나 그 이야기에 묻어있는 나 자신. 그것이 가장 부끄럽고 불편하다.

부끄러움이 전부라면 그렇게 써야지.

배치하는 것의 문제. 어떻게 둘 것인가?

노출하지 말아줘. 그 이야기의 아가씨들이 나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나는 한번도 그렇게 사랑받았던 적이 없고 그렇게 사로잡힌 적이 없다고.

치사한 변명이야. 사로잡히기 싫으니까 하는 얘기.

아가씨들의 사랑은 언제나 거기 있다. 뭘 모르는 듯이 왜 이러니.

누구도 구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수의 작업. 나는 그저 기록할 뿐이다.

위태로워. 달콤한 강아지와 씁쓸한 기억들이 함께하는 잠자리. 예쁜 개가 위로해주니 버티는 밤. 이렇게 달콤한 강아지가 나에게 안겨주다니! 고마울수밖에.

사랑의 기억. 당신. 그립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 그랬지. 받아들여지지 않을거야. 할 수 없어.

어차피 이번 생은 망한 걸까 리셋하고 싶다. 저장해둔 시점에서 불러오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