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복부터 시작했다. 천을 자르고 바느질을 했다. 옷과 가방을 수선했고 소품을 만들었다. 때로는 대바늘이나 코바늘을 들고 뜨개질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물이 디자이너 부띠끄 제품 만큼 근사할 리는 없고 그 정도의 미적 성취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의생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기술을 익히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애착이 생겨버리면 객관적 평가와 무관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에 바느질과 뜨개질을 배우고 확실히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은 예전부터 늘 좋아했다. 최근에는 채식으로 요리하는 일에 좀 더 진지해졌다. 두유가 유제품을 대체할 수 있고, 유부가 어묵을 대체할 수 있으며, 표고버섯이 붉은 살코기를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기존의 레시피를 수정해 나갔다.(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다 요리가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잡채에 들어가는 재료가 줄어들다가 마침내 당면도 빠진 야채 볶음이 되었다. 찐 감자, 볶은 당근, 구운 마늘 같은 것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이쯤 되어버리면 요리라기보다 조리에 가까운 수준, 하지만 제철 식재료를 단순하게 조리해서 먹을 때 가장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만족스럽다.
그 다음으로 주거 문제.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되는 경험이라도 가능할 텐데 어떤 현장에서도 여자 인부를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단 이론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대략의 건축구조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만만한 책이 보이질 않아서 실내건축기사 자격증 교재를 샀다. 단조로운 수험서를 통해 포틀랜드 시멘트의 응결에는 보통 4~6시간이 걸린다는 것, 코르크판이 흡음판으로 쓰일 뿐 아니라 단열판으로도 쓰이는 내장재라는 것, 콘크리트 중에 거푸집 속에 미리 자갈을 넣고 모르타르를 주입하는 프리팩트 콘크리트란 특수 자재가 있다는 것, 벽돌쌓기에는 네덜란드식 영국식 프랑스식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주로 네덜란드 식의 벽돌쌓기로 모서리에 칠오토막을 쓴다는 것, 미역 같은 해초류를 건물의 미장 재료로 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잡다한 지식을 써먹을 일은 전혀 없었다. 내 손으로 시멘트 한 포대도 구입해 본 적이 없는데 특수 시멘트의 종류와 사용법을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개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로서는 전혀 쓸모 없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인류 문명이 멸망할 때까지 벽돌이나 못의 규격 같은 단순한 사실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만 같다. 쓸모 없지만 결코 변하지 않을 안전한 지식을 쌓아가는 일은, 마치 희랍어를 배우는 것 처럼 유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런 공부가 전혀 쓸모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천장에 곰팡이가 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결로현상의 원인과 대처방안을 알고 있어서 꽤나 위안이 되기도 했다. 비록 보수공사를 마친 뒤에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사는 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혼란과 공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수험서 한 권을 읽은 보람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건축 제도법을 다루는 다른 수험서를 읽고 있다. 제도용구를 사용하는 방법, 컴파스와 자를 이용해 직선을 2등분 하는 방법, 직각을 3등분하는 방법, 원에 내접하는 정삼각형을 그리는 방법, 반대로 삼각형에 내접하는 원을 그리는 방법 따위를 흥미롭게 배워가고 있다. 원의 면적을 동심원으로 2등분하는 방법은 오 분 정도 들여다 보다 넘겨버렸다. 자격증 시험을 볼 계획은 없으므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은 가볍게 넘어가도 좋다.
내 평생에 컴파스와 자를 이용해 이런 작업을 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T자와 먹줄펜을 들고 제도 작업을 하는 설계자는,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고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쓰는 작가와 같이 멸종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에 수공구를 이용한 제도를 배워서 뭐에 쓰겠는가? 하지만 언젠가는 쓸모가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상상해본다. 시골집 다락에서 그 집의 것이 아닌 설계도면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먼저 도면 오른쪽 하단의 표제란 정보를 찾아보고, 정투상도 읽는 방법을 회상하며 그 집의 모습을 상상해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도면이 이웃 누구네 집의 것인지 알게 될 수도 있겠지. 오래된 자료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제도법 공부는 한자 공부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최근에 시도했던 몇 가지는 가죽공예와 목공예이다. 가죽을 썰고 구명을 뚫고 바느질을 해서 소품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가죽제품을 수선하는 일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이 작업은 손질된 재료를 구입해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측면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무두질하는 기술을 배워보고 싶다.
담배케이스와 머니클립 세트 |
담배와 라이터가 쏙 들어가는 크기 |
머니클립은 단순한 구조 |
목공예는 가죽공예에 필요한 목타프레스, 바느질용 포니 같은 공구를 만들기 위해서 우연히 시작했는데, 이 작업이 가죽공예보다 재미있다. 게다가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트리머로 모양을 다듬고, 드릴로 구멍을 뚫어 조각을 연결하고, 사포질을 해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는 과정 내내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난다. 목재가 된 나무는 묵직하고 단단하다. 그러나 한참 손을 대고 있으면 부드럽고 따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평생 나무를 만진다면 참 좋겠다.
이것은 내가 만든 나무 탁자, 흔들리는 탁자를 뜯어낸 뒤 리폼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