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7일 화요일

동생과 대화.


1.

동생이 퇴근길에 돈을 주웠다고 했다. 우와 부럽다~했더니 그 돈을 방 바닥에 툭 던진다. "자 이제 누나도 주워." 아싸 집안에서 돈 주웠다. 우리는 행운의 남매!


2.

"누나야. 다음 생에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거면 꼭 남자로 태어나라. 굳이 여자로 태어나고 싶으면 영국 같은 데서 태어나고."

- 동생의 조언.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선택에 대해.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일들이 있지. 그럴 땐 일단 질러야지.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가능성 중에 최악인 것 부터 차례로 배제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확실히 포기할 일들을 몇 가지 정했다.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 수많은 가능성을 충분히 신중하게 검토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믿는다.

어떤 일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욕심 내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해야지.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일이라면 후회할 필요는 없겠지. 괜찮다. 괜찮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런 건 이미 누군가 해놓았겠지.

겉보기에 허약하고 허술해도 중심에 들어있는 것이 단단하다면 해낼 수 있어. 그런 생각과 감정과 현상을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세상에 믿을 수 있을만한 일이 없을 거야.

어떻게든 삶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좀 더 영리해지고 싶다.

영남제분.

영남제분 측이 명예훼손을 이유로 네티즌 140명을 고소했다고 한다. 마치 훼손 될 만한 명예가 남아있는 것 같이 군다.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씨가 하양을 살해한 사건의 핵심에는 7억원을 받고 회장님 딸과 결혼한 김현철 판사가 있다. 이 사람에게 실제로 내연녀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장모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아서 무고한 사촌동생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만들어서 자기의 곤란함을 피하려고 하는 비열한 거짓말쟁이.

어쨌든 영남제분이 분노한 시민들의 저항을 피하고자 한다면, 살인사건과 연루된 회장 일가가 경영에서 손을 떼면 된다. 회장 부인 윤씨와 그 일족이 더러운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의 가족에게 사죄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법적 처벌마저 편법으로 무시할 수 있었던 돈은 모두 영남제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영남제분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부패한 회장일가를 몰아내고 경영을 정상화하는 데 성공하기를 바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시민들이 연대의 힘을 보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회사가 회장 일가와 분리될 수 없다면 사라지는 편이 낫겠다. 무고한 대학생이 정신 나간 사모님의 지시로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일도 벌어졌는데, 더러운 기업이 시민들의 불매운동에 밀려 폐업하는 거야 정당한 일이잖는가?

안티 영남제분 카페
http://cafe.naver.com/antiynam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나의 늙은 개 세티.

나의 늙은 개 세티는 눈이 멀어 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백내장이 진행되면서 초롱초롱했던 까만 눈이 탁한 회색으로 변하고 있다. 개가 보는 세상은 가장자리부터 뿌옇게 흐려질 것이라고 했다.

시츄종의 개들이 흔히 그렇듯 나의 개도 귀에 염증을 달고 살았다. 올 여름에는 날씨 탓인지 더 심해졌다. 지금은 사람에 부르는 소리도 문소리도 거의 듣지 못한다. 시력에 이어 청력을 잃어가는 느낌이 어떨까 상상하기 어렵다.

세티가 그만큼 더 살 수 있다면 내 수명에서 십 년 정도 떼주어도 좋아. 언젠가 동생과 개의 수명에 대해 이야기하다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말했다. 동생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 수명도 나눠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거래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시력도 청력도 잃은 채 오래오래 살아가는 일이 축복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제는 세티의 식습관에도 크게 제한을 두지 않는다. 사람이 먹는 음식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특히 녀석이 좋아하는 과일을 자주 먹인다. 미각이 살아있고 치아가 남아있으며 식욕이 있을 때에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 노인네한테 먹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우리 세티 옹, 이제 초등학교 앞에 가면 그곳에 있는 어린이들보다 절대나이가 많아져 버린 늙은 개, 부디 미각을 잃지 말고 건강하게 버텨주렴.


+케이크에 딸려온 폭죽을 터뜨렸는데 개는 깜짝 놀라지 않았다. 화약 냄새가 나자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몸을 웅크렸다. 마트에 갔다가 개를 위해 양고기 육포를 사왔다. 비린내가 나는 말린 살코기를 찢어서 바닥에 내려 놓았으나 개는 제 눈 앞에 펼쳐진 것을 보지 못했다. 이런 오라질 개, 육포를 사와도 왜 먹지를 못하니... ㅠ 8.27.

8월 20일의 메모.

1.
남자형제가 있는 여자들은 동거나 결혼생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도 남자들의 행동양식과 심리상황에 대해 실질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여동생이나 누나를 가진 남자들이 가정에서 여자에 대해 배우는 바가 별로 없다는 점은 신기한 일이다.


2.
순탄한 결혼생활의 비결을 묻자 언니가 웃으며 답했다. 남편을 바꾸고 싶을 때 꾹 참고 커튼을 바꾸는 거지. 어떤 여자에게는 커튼이 아니라 새 옷이나 그릇일 수도 있겠다.

- 박선생님에 따르면 남자는 자동차를 바꾼다고 한다.

소비사회에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면 열심이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털썩)


3.
B언니의 사진은 도시를 묘사한 동양화 같았다. 언니가 바라보는 도시풍경은 쓸쓸할 정도로 고요하다. 건물과 자동차, 사람이 가득 찬 도심에서 이렇게 텅 빈 공간을 발견하다니, 언니의 사진은 슬프고 아름답다. 그러나 언니는 이제 디자이너로 밥벌이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전해들었다. 언니가 작업을 계속하길 바라지만 그렇게 권할 수는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역시 우리가 나아갈 길은 기본소득인가!


4.
작년에 내가 베트남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막연하게 꼽아 본다면 세 단어가 떠오른다. 쌀국수, 호치민, 바오닌. 바오닌은 베트남전에 대해 서럽게 슬픈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눈 네 사람 중에 그 작가를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내가 베트남어의 독특한 성조를 발음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위대한 작가를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꽤나 아쉬웠다.


5.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가능성 중에 최악인 것 부터 차례로 배제하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확실히 포기할 일들을 몇 가지 정했다.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 수많은 가능성을 충분히 신중하게 검토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믿는다.


6.
민족을 분열시키는 빨갱이에 대한 일갈!

이즈음에 세상에 빨갱이란 말이 유행한다. 독립신보의 글을 인용해보면,

'요사이 유행되는 말 중에 "빨갱이"란 말이 퍽 유행된다. 이것은 공산당을 말하는 것인데, 수박 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빨간 놈이 있고. 수밀도 모양으로 거죽도 희고 속도 흰데 씨만 빨간 놈도 있고. 토마토나 고추 모양으로 안팎 속이 다 빨간 놈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 빨간 놈인 것은 몰라도 토마토나 고추 같은 빨갱이는 소아병자일 것이 요. 수박 같이 거죽은 퍼렇고 속이 붉은 것은 기회주의자일 것이요. 진짜 빨갱이는 수밀도 같이 겉과 속이 다 희어도 속알맹이가 빨간 자일 것이다. 중간파나 자유주의자들까지도 극우가 아니면 "빨갱이"라고 규정 짓는 그자들이 빨갱이 아닌 빨갱이인 것이다. 이자들이 민족분열을 시키는 건국 범죄자인 것이다. <독립신보. 1947.9.12>'

-인천상륙작전. 윤태호. (저감독의 페북에서 재인용)

2013년 8월 19일 월요일

며칠의 메모.



8.14.
나는 크고 굵은 게 좋더라. 촛불 말입니다.
집회에서 재미있는 언니들을 만났다. 국정원 사태로 인해 만난 인연이니 레이디가카와 원세훈과 김용판에게 땡큐해야 하나...;


8.15.
내일 아침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다짐한다면 거짓말. 행복은 지금 여기의 문제. 삶에서 나에게 주어진 몫의 행복이 있다는 약속도 거짓말. 행복은 다른 사람이 줄 수 없는 것,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


동생이 빵집에서 일하는데 내일 휴일이라 연장근무를 했다. 밤에 집에 같이 들어가려고 점포에서 기다리다 보니 자정이 넘어 빵 먹으러 오는 사람이 꽤 많더라. 그들도 나도 기운차게 늦게까지 돌아다닌다. 늦게까지 일하는 동생이 가여웠지만 그나마 일자리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막차 만원버스 타고 집에 들어와서는 인터넷으로 매출보고 하고 있다. 아이쿠 ㅠㅠ;
노동시간이 얼마나 길고 노동강도가 얼마나 힘드냐의 문제를 떠나서 노동조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 조율하고 협의하는 대신 상명하복 식으로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슬픔의 포인트. 나도 노동자였을 땐 그랬지, 새삼 괴롭네.


8.16.
책이나 인쇄물에 들어갈 글을 쓸 때는 나무를 생각한다. 종이를 만들기 위한 나무의 희생이 가치 없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두기만 하고 읽지 않고 방치해두고 있는 책을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 저자보다 나무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디지털 매체에서 사용될 글을 쓸 때는 부담이 덜했다. 쓸모 없는 짓을 해도 괜찮다는 느낌이라 아무래도 가볍다. 그런데 문득 전기를 소비하는 것은 나무의 희생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좀 더 조심해서 아껴가며 써야할 것 같다.


8.17.
햇감자가 풍년인 모양이다. 100그램에 150원 세일하는 걸 2킬로그램이나 집어들고 왔다. 한밤중에 감자전을 부치고 감자스프도 끓였다. 조금 먹고 냉장고에 쟁여두었다. 감자 요리는 차게 먹어도 맛있지. 주말에는 요리 안 할란다.

결국 한숨도 못잤다. 뭔가 꽂히면 잠이 달아나버려... 
비몽사몽인 채로 연인을 만나러 갔다. 물리적인 공간이 멀어도 꽂히면 달려가야지.


8.18.
수영장에 갔다왔다. 한바탕 수영을 하고 나면 불볕더위도 견딜만해진다. 히히 시원해~


8.19.
해가 쨍하다. 베란다에 나가 빨래 널고 났더니 땀이 쭉 난다.
이 더위에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울까, 냉방 안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고생이 많겠지.
여름에는 모두들 일 안 하고 쉬었으면 좋겠다.


"책에서 위로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책으로 위안을 준다는 것은 인생의 고통을 얕잡아 본 겁니다." - 샤를 단치의 인터뷰, 이영진 선생님의 인용을 재인용.
- 책 속에는 길이 없지만 지도는 찾아낼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작업이 자기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란 무엇일까. 신이란 무엇일까. 내가 느꼈던 경외감은 다르지 않은 하나의 감정이었는데." 곤이의 말
- 경외감은 숭고한 가치에 대한 존중심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존중심을 가진다면 좋겠습니다.



2013년 8월 16일 금요일

감정의 폭발에 대해.

울음을 보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이 흐를 것 같을 때에 약 십오 초 정도만 참아내면 딴 생각을 하든 자리를 피하든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할 방도가 생긴다. 울음은 참아 보고 웃음은 참지 말자고 나름의 방향을 잡아두었다. 그런데 이런 일에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아서 아주 격한 감정은 늘 축축해진다. 감각이 생생해지는 열락의 순간에도, 발 밑의 땅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좌절의 순간에도 그렇다. 그렇게 울어버리고 나면 나 자신의 내면에서는 무언가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미안해진다. 죄책감과 죄의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악순환인 것이다. 

2013년 8월 13일 화요일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생긴 일.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내가 제멋대로 움직이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가끔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겨 안거나 젖가슴을 쥐거나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내 손을 놓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물어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한 단어로 말해봐요. 그는 슬며시 눈을 뜨고 답했다.

너.

그 말을 듣자 그동안 내 얼굴에 씌워져 있던 꼭 내 얼굴 모양으로 생긴 가면이 찢어졌다.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생긴 일이다.


2013년 8월 12일 월요일

더운 날의 편지.

이 더운 날, 당신이 그리워. 너무 더워서 허기도 잊고 말지만, 아무리 더워도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아. 지금의 나는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천진하지도 못하지만 그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 사실 난 언제나 추운 날 보다는 더운 날이 좋았거든. 뜨거움이 좋아. 당신이 그리워. 그 뾰족한 콧잔등에 애써 모아 놓은 송글송글 땀방울이 그립고 슬쩍 건드리면 끈적하게 달라붙는 팔뚝이 그리워. 흥건한 땀 냄새와 겨드랑이 냄새과 은근한 사타구니 냄새가 그리워. 당신의 머리카락과 수염, 배꼽 근처에 있는 털에서는 마른 모래 냄새가 나지. 허벅지와 무릎 뒤, 팔꿈치 안쪽에서는 짭쪼름한 비린내가 나. 그 냄새가 그리워서 바다에 가고 싶어.

혼자 있을 때 손등과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는 습관이 생겼어. 스스로 내뿜는 더운 숨을 느끼면서 당신의 숨결이 닿았던 순간을 떠올리거든. 내 입 속에 당신의 손가락이 들어왔던가, 내 손가락이 당신의 입 속으로 들어갔던가, 어느 손이 어느 입술을 찾아가 범하고 말았는지, 또는 어떤 입술이 그 손가락을 물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는지, 그 끈적한 기억이 모두 더위에 녹아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나봐. 내 손과 내 입술은 서로를 더듬으며 당신을 회상하고 있어. 그렇게 당신을 그리워 할 때마다 뱃속이 간질간질해지고 발가락이 꼬부라지는 기분이 들어.

때로는 당신과 내가 꼭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꼭 연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이 여름은 즐거웠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물론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지도 못했을 테고 팔을 베고 누워서 축축한 겨드랑이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을 테고 더위에 축 늘어진 고환을 핥을 수도 없었을 거야. 그런 일들이 아쉬울 지는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이런 것은 부가적인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어. 당신의 삶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해졌을 것 같아. 그 이상을 확인할 수 있다니 더 바랄 게 없네.

여름이 오기 전에 나는 허풍스런 브래지어를 벗어던졌어. 이제 보지 모양을 그려놓은 팬티도 벗어던질 테야. 당신을 만났으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부디 당신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도 자지 처럼 무거운 걸 굳이 달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아. 늘 가랑이 사이에서 존재감을 확인하는 일은 꽤나 귀찮을 것 같아. 적어도 이 여름에는, 너무 더우니까 좀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기를, 무더위가 지나고 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2013년 8월 9일 금요일

무작정 여행기 13. 무정한 사귐.

쿤밍 시내에 있는 취호



10월 28일 리핑

전날 밤 게스트하우스에 리핑이란 중국인 친구가 들어왔다. 내가 묵었던 투투게스트하우스는 한국인이 사장이고 아무래도 한국인 손님이 대부분인 곳이었다. 중국인이나 외국인이 묵었다 가는 일도 드물게 있긴 하지만 따로 홍보를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리핑이 이 숙소를 찾아온 것은 한국인 이ㅇㅇ 선생의 소개 덕분이었다. 이선생은 쿤밍에서 이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다가 북부의 산간지역으로 떠난 분인데 그곳에서 리핑 등의 일행을 만나 함께 트레킹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쿤밍에 돌아와서 남은 일정은 같은 숙소에서 머물기로 했단다.

이선생은 시원시원한 눈매와 밝은 웃음이 좋은 느낌을 주는 동갑내기 남자분이었다. 중국어를 전혀 못 하데도 리핑을 포함해 중국인 여덟 명과 동행이 되어 운남의 북부 샹그리라와 매리설산을 지나 사천성 야딩까지 돌아보는 긴 코스를 함께 했다. 이선생과 리핑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장난을 치면서 친해졌다고 했다. 한 번은 산장의 숙소에서 아침으로 죽과 몐바오(面包, 밀가루 찐빵)가 나왔다고 한다. 리핑이 남은 빵을 싸가려는데 자기 주머니가 비어있지 않아서 이선생의 주머니에 넣어달라고 했단다. 그러자 이선생은 먹던 죽그릇을 들어서 리핑의 주머니에 부어 넣으려고 했다고. 손짓발짓을 섞어 이런 일화를 들려주면서 두 사람은 개구쟁이 같이 웃었다.

길을 걸을 때 언어는 정말로 아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리핑에 관해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사는 곳, 가족관계, 나이, 여행경로, 취미, 직업 같은 것들. 하지만 리핑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수집한다고 해도 이선생 같이 친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께 험한 산을 올랐던 경험을 공유하는 관계는 정말로 특별할 테니.

리핑과 이선생은 남은 일정이 며칠 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오래 계셨던 김ㅇㅇ선생과 함께 쿤밍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선생과 김선생은 젊은 남자들이고, 리핑은 아리따운 광동 아가씨, 나는 어쨌든 여자사람, 어설프나마 더블 데이트 같은 분위기로 구색이 맞았다. 우리는 일단 쿤밍 시내의 취호에 갔다.


버드나무와 연잎이 우거진 공간
취호공원(翠湖公園, 취후공위엔)에는 호수를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고 광장에는 위락시설도 있었다. 비취호수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호수에는 수련이 풍성하게 무리지어 자라고 있었고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흐드러져 있었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공원인지라 시민들이 모여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적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호수와 나무를 보며 산책하는 동안 사람 구경까지 할 수 있었다.

얼후와 비파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들

취호 산책로에 들어서는데 승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갑자기 내 손에 목걸이를 쥐어주었다. 옥색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불상 모양 팬던트에 빨간 끈이 달려 있었다. 이렇게 조악한 팬던트를 목에 걸고 다닐 정도로 키치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은 13억 중국 인구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승복 입은 남자가 진짜 종교인일 가능성은 아주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인 것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부모의 평안을 기원해주는 일은 기뻤다.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내 가족들의 일생평안을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에게 소액의 돈을 내밀자 그는 다시 한 번 내 부모를 위해 축원했다. 이렇게 싼 값으로 부모와 형제의 평안을 구해도 좋은 것일까 미안해질 정도였다.

취호는 중국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마이클잭슨의 춤을 중국풍으로 재해석해 계승하고 있는 아주머니 트리오, 얼후와 비파와 대금과 소고와 짤랑짤랑 탬버린으로 이루어진 악단의 합주, 그에 맞춰 부채춤을 추던 여장한 할아버지와 노래하는 아주머니, 단둘이 마주보고서 진지하게 얼후와 비파를 연주하는 아저씨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관객들을 만났다. 음악적 성취나 기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음악과 무용을 즐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종교인과 예술가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일을 해내면서 세상을 가치 있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 유사 종교인과 음악과 무용을 즐기는 아마추어 예술인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존중감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순간의 여흥이나 위안일지라도 덕분에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취호공원에는 간식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늘어서 있었다. 리핑은 탕후르를 보고 신이 나서 골라 잡았고 나는 노점에서 파는 야자를 샀다. 먹을 거 사들었으니 본격 관광객 모드로 두리번 두리번 시민들의 공연을 구경하며 넓은 호수를 따라 걸었다. 한참 걷다 지쳐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새우요리집에 들어갔다. 매운 새우볶음 요리를 먹고 술도 조금 마셨다. 취호 근처에는 운남대학이 있었다. 밤이 깊어도 대학가에는 사람이 많았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한적했다. 일행과 함께 대학가의 밤을 즐기며 걸었다.

운남대학 인근 음식점에서 우리를 살찌운 매운 새우 볶음 요리

일행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길을 잘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길을 묻는 리핑과 지쳐서 길가에 걸터 앉은 이선생님.
(초상권에 대한 허락을 미리 구하지 못해서 잘생긴 얼굴을 가립니다.)


10월 29일 생일 케이크

다음 날도 이선생과 김선생, 리핑과 동행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조선족이 경영하는 동북식 꼬치집에 갔다. 숯불을 앞에 두고 직접 꼬치를 구워 먹는 식인데,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식 꼬치구이집은 대개 동북 스타일이라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리핑은 중국 남부의 광저우에서 왔기 때문에 직화구이 문화가 특이했던 모양이었다. 신이 나서 연신 사진을 찍으며 먹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오화구로 돌아오자 김선생과 이선생이 남자들끼리 들를 데가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와 리핑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씻고 나오기로 했다. 다시 일행들을 만났을 때 김선생의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언젠가 이번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삼십세 생일을 맞는 일에 대한 부담감을 설명했던 적이 있었다. 무작정 떠나온 이유, 스스로를 좀 멀리서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 혼자 섬서성 박물관을 돌아다닌 뒤 교자를 먹으며 생일을 자축했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김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마음에 두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내일이면 리핑은 광저우로, 이선생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했다.

김선생님이 선물해준 생일 케이크

이국땅에서 여행 중인데 일주일이 지난 뒤의 생일 케이크는 감동적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한 오붓한 파티는 진심으로 즐거웠고 김선생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리핑, 이 매력 넘치는 광동 아가씨가 생일을 축하한다며 뽀뽀를 해주었다. 만난지 고작 사흘 만에 아름다운 외국인 아가씨의 입맞춤을 얻어낸 나란 여자, 레즈비언이 아닌 것이 한스럽다.

달이 차올라 보름달이 되었다. 옅게 깔린 구름 사이로 둥근 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 너머로 사라지곤 했다. 이백의 시가 생각났다. 마침 아이폰에 저장해 두었기에 꺼내서 조용히 읽어보았다.

月下獨酌 월하독작, 달빛 아래서 혼자 술을 마셨소
-李白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들 사이에서 한 병의 술을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벗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杯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청하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까지 맞이하니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월기부해음, 달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니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나를 따라 다니네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을 친구하고 그림자 거느리고
行樂須及春 항낙수급춘. 즐거움을 누리는 이 일 봄에야 가능하리
我歌月徘徊 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도 따라다니고
我舞影零亂 아무영령난.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춤을 춘다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깨어서는 함께 서로 즐기다가
醉后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자 흩어진다
永結無情游 영결무정유, 무정한 사귐을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달 아래서 혼자 술을 마시던 시인이 달과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는 세 명이 모였다며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웃음이 나오는 풍경이다. 나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생겼다. 우리가 헤어진 뒤 다시 만나려면 이백 같이 은하수를 예약해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무정한 사귐이야 말로 여행길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리라.


구름이 낮게 깔린 쿤밍의 하늘


10월 30일 이별의 날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보니 리핑과 이선생은 이미 게스트하우스를 떠났다. 아침 비행기와 기차편이라서 출근시간 전에 서둘러 나간다고 했었다. 리핑이 떠난 빈 침대를 보니 어쩐지 쓸쓸해졌다. 리핑은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항상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틀어 놓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조금 거슬렸는데 막상 사라지니 아쉬웠다.

우리와 같은 방을 썼던 아주머니도 오후에 짐을 싸들고 한국으로 떠난다고 했다. 아침에 함께 나가서 얼쓰(쌀국수)를 먹었는데 밥 먹고 오는 길에 과일가게에 들러서 과일도 사주셨다. 지나가다 보이길래 하미과가 맛있다고 했을 뿐인데, 감사합니다! 연세가 울 엄마 뻘이라 이름을 부르기도 그랬고 별로 친해지지 못했는데.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일정을 당겨 들어가시는 거라 당신도 많이 아쉬웠을 것 같다.

나도 쿤밍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편안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운남의 기후와 환경에도 충분히 적응한 것 같고, 일행도 생겼으니 다시 길을 걸을 차례. 가이드북을 펼처놓고 여행루트를 살펴보고 내가 만나게 될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도 찾아 보았다.

운남성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중 인구가 제일 많은 민족은 이족(彝族)으로 446만명에 달한다. 이족은 호랑이를 숭배하는 민족인데, 천신이 세상을 만들 때 호랑이를 잡아서 큰 뼈로 하늘을 받치고 호랑이의 눈으로 해와 달을 만들었으며 호랑이의 수염으로 햇빛을 만들고 호랑이의 이빨로 별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전해진다.

호랑이에 얽힌 신화를 읽다가 잠들었기 때문인지 꿈에서 호랑이와 함께 춤을 추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서 양 발로 번갈아서 두 번씩 바닥을 구르고 어깨와 팔을 같은 방향으로 흔들흔들 움직이는 춤이었다. 호랑이도 앞발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호랑이의 꼬리가 물결치듯 흔들렸다.


무작정 여행기 12. 중화의 변방 또는 뎬 문명의 중심.

두 마리의 표범이 돼지를 사냥하는 모양의 서한시대 청동도금 장식


10월 25일 운남성 박물관

투투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은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냈다. 나는 푸얼차를 마시면 어쩐지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제하려고 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찻상에 둘러앉아 호릅호릅 얌얌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운남 지역의 왕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는 아주 작은 옥새에서 시작했다. 공통시대 이전에 쿤밍 지역에는 뎬이라는 고대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뎬'은 한자로 삼수변에 참진眞자를 쓰는데 컴퓨터로는 입력이 안되는 글자인 듯, 병음은 Dian)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남만정벌은 바로 이 근처의 남쪽 지역에서 3세기 경에 있었던 일이다. 한족의 군대가 진격하기 훨씬 전에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뎬 왕조는 과연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을까? 뎬 왕조의 유물인 작은 옥새가 그 증거라고 하는데 진상조사를 위해 운남성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운남성박물관은 규모 면에서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소수민족 관련 전시품이 많다고 했다. 투투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베이시취(북시구)차장으로 가서 84번 버스를 타고 종점 한 정거장 전인 운남성예술극장까지 가면 된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룰루랄라 출발했다.

운남성 날씨는 정말 환상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니 기쁘다. 시리게 푸른 하늘에는 가끔씩 한가로운 구름이 야트막하게 지난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걷노라면 선선한 바람이 휘 불어온다. 가로수 아래를 걷는데도 숲길을 걷는 느낌이 들 정도로 녹음이 우거졌다. 맑고 건조한 공기 덕분에 매운 국물을 먹을 때나 따듯한 차를 마실 때나 상쾌한 기분이다.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도시 홍보 포스터의 카피, 미려춘성 행복곤명, 인정!

운남성 박물관

쿤밍의 가을 하늘은 새파랗다!
운남성박물관(雲南省博物館, 윈난셩보우관)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장하며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전시설명 프로그램이 있다. 입장료는 무료.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들렀던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입장료로 10~50위엔 정도를 지불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입장료를 냈던 기억이 없었다. 올림픽 끝나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 대중개방 정책이 생긴 걸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거의 무료화 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반가운 일이지만 전시시설 입장료를 무료화한다고 딱히 방문자가 많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운남성박물관에도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박물관 1층은 전시준비 중인 듯 닫혀 있고, 2층부터 상설전시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 있었던 뎬 고대왕국 뎬에 대한 전시였다. 운남에는 한족 국가가 아닌 토착 왕조로 대리국과 남조국이 있었다. 남조(南詔, 난짜오)는 8세기 당(唐)대 이 지역에 있었던 버마족의 나라였고, 대리(大理, 따리)는 10세기 들어 남조국이 멸망한 뒤 이 땅을 차지한 바이족(白族) 의 나라였다. 남조국과 대리국은 한족 국가와 중앙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문물의 교류를 담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중화문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조와 대리에 대해서는 꽤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한참 전에 있었던 뎬 왕국의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근두근 전시실로 들어갔다.

1955년 Jining의 Shizhaishan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적.

사마천의 사기에 전국시대(정확히는 공통시대 이전 339년) 주나라의 장군 좡챠오(zhuangqiao)가 디엔츠(滇池, dianchi) 호수 근처로 진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윈난의 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고대왕국인 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왕국이 실재는지가 의문이었는데, 1955년 3월에 유적이 발굴되며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장품으로 보이는 청동인물상과 무기, 농기구, 그릇, 옥기와 조개껍데기 등, 1전시실은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뎬 왕조의 도장(모형)이 있었다. 가로세로 약 2cm 정도 크기로, 손잡이의 뱀 같은 인물상을 포함한 높이는 1.5c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금 도장이었다. 이 도장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이야기한 물건이었다. 이 도장이 과연 고대왕국 뎬에서 한자를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진시황의 통일제국 이후에는 한자가 중화의 변방인 운남지역에서도 통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한 증거는 이 도장 하나 뿐으로 다른 유물에서는 한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작은 유물에는 중화주의에서 비롯한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 하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진상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금 도장을 지나 왼쪽의 2전시실로 들어서니 뎬국의 다양한 청동병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뎬왕조의 유물 설명에 시대 표기를 서한(西漢 206 BC~AD 25) 또는 전국(戰國, 475~221 BC)이라고 달아놓은 점이 특이했다. 물론 이 왕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한족 왕조를 기준으로 삼아 적어둔 것이겠지만, 이 지역이 한의 세력권이었으리라 연상하도록 하는 장치는 아닌가, 다시 한 번 중화주의의 통합정책에 대한 음모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뎬 왕조와 한자문명과의 연관은 알 수 없었지만 그때의 사람들이 남긴 청동기 유물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낯선 상징물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부장품이었을 청동 종

살벌하게 생긴 으스스한 무기들

전국시대의 청동부장품으로 악기인 것 같다.
뎬 왕조를 상징하는 소 모형이 특이했다.
첨에는 뿔이 강조된 황소인가 싶었는데
이 지역에 사는 물소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시자이산에서 출토된 서한시대 청동상, 귀엽다.

우산 든 남자 모습인데 표정이 얼버리.
이 남자와 그가 받쳐든 우산의 주인은
아마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겠지.

춤추는 무희들 모형도 재미있었다.
역동적인 몸놀림이 느껴지는 장식.


춤과 노래는 문명의 가장 유쾌한 부분.
춤은 몸짓으로 남고 노랫소리는 목소리로 남아 있을까.

독특한 문양의 부장품

이 지역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을 것이다.
햇살 찬란한 곳이니 당연히 그랬겠지.


그리고 더러운 전쟁광들의 유물도 남아있었다. 유골함을 장식하는 뚜껑에 묘사된 전쟁의 참상과 부장된 각종 무기들이 있었다.


유골함 뚜껑,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역시 참혹한 모습을 묘사한 유골함 뚜껑.


청동제 무기들 중에 특이한 창이 있었다. 세모꼴 창날의 아랫쪽 두 군데에 남자의 모형이 사슬에 걸려 있었다. 벌거 벗겨지고 팔이 뒤로 묶이고 머리는 풀어 헤쳐진 채 고개를 숙인 포로의 모습이었다. 적을 사로잡은 뒤 그 모양을 만들어 무기에 매달아서 무덤까지 가지고 갔던 창의 주인은 얼마나 미친놈이였을까.

청동검과 창날 등의 무기들.

특이한 세모꼴 창날

패배하고 창날 끝에 매달린 사람들

서한대의 청동기 무기 중애는 사슴, 호랑이와 황소, 곰, 표범 등의 동물이 장식된 것도 있었다. 그 중에 뱀 위에 올라탄 두 마리 사슴 도안이 특이했다. 보통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이고, 두 마리가 몸을 꼬고 있을 때는 인류의 시조인 복희여와를 연상할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관이 화려한 사슴은 시베리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상징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 원래 있던 뱀 부족이 북부에서 내려온 사슴 부족한테 당했던 걸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뱀 위에 올라탄 두 마리 사슴 도안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호랑이가 소와 대결하고 또 소를 잡아먹기도 하는 도상도 흥미로웠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분명 어떤 맥락이 있었던 상징이었을 것이다. 표범이 쥐나 소를 잡아먹는 장식도 있었다. 우경을 했던 정주문명과 노마드의 대립을 보여주는 도상일까?


서한대의 뎬왕조 도끼 머리 장식을 보면

호랑이도 있고 물소도 있고


표범이랑 소가 사이 좋게 장난치는 게 아니라

덮쳐서 잡아먹는 도상도 있다. 

표범이 쥐를 잡고

먹고 먹히는 살벌한 묘사가 많았다.

이 짧은 도끼는 평화로와 보이는데

곰 세 마리 쪼르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같은 장식이 달려 있다.

개구리 모양 청동 창머리
개구리는 다산과 번식의 상징이었을까?
표범과 호랑이 도상은 전국시대 유물까지 이어졌다. 무기만이 아니라 유골함에도 등장하고 청동 탁자에도 등장하는 모티브였다.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이 지역에 흔한 맹수였기 때문에 반복해서 묘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장품의 장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토템이었다고 추정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요기는 표범이 숨어 있네.

무시무시한 징 박힌 몽둥이 머리에는

표범과 소가 뒤엉켜 있다.

짐승들이 우글우글 붙어 있는 유골함

죽은 이는 말을 타고 있고 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

물소 뿔 모양이 멋지다.

여기도 표범과 물소가 뒤엉켜 있고
사이에 송아지가 한 마리 들어가 있다.

정면에서 보면 물소뿔이 장대하게 보이는 모양

물소 꼬리를 물고 있는 표범님 표정이 진지하셔.

생활용구로 넘어가서 청동 화로와 숟가락, 물레, 실잣는 도구, 농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 도기화덕이 맘에 들었다. 실내에서도 한 자 정도 되는 장작을 몇 개 넣고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겠지. 어쩌면 차를 우려내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보기만 해도 훈훈한 모양이다. 도기그릇과 항아리, 베틀추 같은 것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뎬 왕국에는 전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라는 증거니까.

작은 크기로 실내에서 썼을 것 같은 도기 화덕

실 잣는 도구 纺轮及

불쏘시개와 국자 같은 것

청동국자 손잡이에 있는 호랑이와 물소 장식

그런데 청동 국자에도 호랑이가 황소 잡아먹는 피규어가 붙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 삶은 왜 이리 험악했던 걸까. 뭔가 싶어 나중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사장님께 물어보니 이족의 상징이 호랑이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소수민족 신화를 찾아보니 대략의 답이 나왔다. 이족(彝族)은 호랑이를 숭배하는 민족이었는데 약 3세기 이전에는 이들이 운남 지역의 주류였다. 그러다 태족(傣族)의 세력에 밀려났는데 표범은 태족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야한 장식조각. 그림을 클릭하면 커져요.

옻칠을 한 매발톱 모양 목제 장식 漆木鷹爪形木祖


전쟁이 아니라 생활을 묘사한 서한시대 유골함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뭘 하는 걸까 궁금했다. 중앙의 둥근 기둥은 탑 같이 생겼는데 종교적인 상징물일까? 가마 타고 가는 사람, 말 타고 가는 사람, 짐 지고 가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일상생활을 묘사한 모형이 재미있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유골함


한쪽에 거대한 청동 기마인물상이 보여 달려갔다. 이렇게 거대한 동상이 출토됐다니 뎬 왕조 멋지네!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서 설명을 보니까 그저 최근에 당대의 무사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어둔 모형이란다. 말안장과 마구는 갖추었는데 신발은 신지 않는 무사, 이런 이미지라고 상상했구나.

뎬 왕조의 무사를 상상하면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운남성 지역은 서아시아와 남부 아시아가 만나는 지역이라 뎬 왕조도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고 한다. 금과 옥, 마노 등의 귀금속 장신구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신구에는 공작새가 주요 모티브로 나타났는데 태족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청동북 모양으로 만든 마노 구슬

소머리 모양의 홍옥수 구슬

옥으로 만든 환

터키옥(녹송석 绿松石) 목걸이

자개 목걸이
우산 같은 것을 들고 있었을 여자 상
얼굴이 확실히 한족은 아니고 동남아 느낌이다.
태족은 태국 사람들과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 민족인 듯.

공작새 모양과 태양을 상징하는 원 문양이 장식된 청동거울
공작과 태양은 태족의 상징.

부장품 집 모형을 보니 건축물이 특이하다.
지붕 위로 겹쳐올린 서까래를 길이 맞춰 다듬지 않고
그냥 위로 쭉쭉 올려놓았다.

사람과 소 도안이 계속된다.

네 명의 사람과 소, 일곱 마리의 소, 오방의 소.
서한과 동한(AD 25~220)의 물소 모양 허리띠 장식.

물소 세 마리 머리가 겹쳐져 있고

물소뿔 모양의 장식

물소는 엄청 사랑받은 짐승이었던 모양이다.

2전시장을 돌아나와 맞은편으로 가면 3전시실, 여기도 뎬 왕조의 생활 면면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대의 동전이 여기서도 출토되었다고 하니 교역이 활발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한자가 통용되었을 거라고 믿어도 될까?

동한(AD 25~220) 대의 동전인 오수전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묘기하듯 불을 밝히는 사람 모양의 등잔
뎬 왕조의 청동기 유물들은 한대의 청동기와도 유사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아마 전세계 공통이지 싶다. 몇몇 특이한 도상을 제외한 일상용품, 그릇, 항아리, 화로, 동검 따위는 한족의 것과 차이를 모르겠다. 특히 옥으로 만든 수의는 이것은 정말 한족문화라 생각했던 건데, 운남 티벳 서아시아 지역에도 비슷한 유물이 있었을까? 나중에 찾아봐야지 했는데 돌아와서 찾아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청동 그릇과 화로 등

납작한 옥 조각을 연결해서 수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3전시실은 뎬 왕조의 청동기 문화와 생활상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되었다. 청동유물을 확대해서 제작한 모형들도 전시되어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뎬의 남자들는 둥글게 조개 모양으로 상투를 꼬아 틀어올렸고, 여자들은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묶어서 늘어뜨렸다는 식의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해서 아쉽다.

당시에는 이런 디자인의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물건을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는 과정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전부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일테면 뎬 왕조의 청동북(징과는 다르게 땅에 내려놓고 치는 형태) 유물이 많았지만, 이들이 오직 청동으로 만든 북만 두드리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나무테에 짐승가죽을 씌운 북을 만들어 썼을 테지만 2천 년의 시간이 지나며 부패해 사라졌을 것이다. 남아있은 것은 극히 일부,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겠지.

밀불교의 탱화
3층은 소수민족의 공예품 전시실이었다. 알록달록 현란한 문양이 들어간 의류와 장신구들, 섬세한 자수와 장식이 아름다웠다. 이곳에 전시된 공예품은 오래된 유물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들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종이공예, 도기와 자기들, 목공예품, 민속화, 밀불교의 탱화, 가면 등등. 엄청 긴 두루마리 그림, 지옥부터 부처님한테 가는 길을 묘사한 그림도 있었다. 귀금속 장신구부터 생활용구까지 소수민족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한족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의 문화가 운남성 박물관의 주요한 볼거리.

신에게로 가는 길, 신로도 두루마리 그림.

소수민족의 가면 공예품

박물관의 뮤지엄샵에서 이런저런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자수장식이 들어간 작은 지갑이나 주머니들이 28-48위엔, 티셔츠 68위엔, 염색손수건 26위엔, 머플러 180위엔, 귀걸이 98-138위엔 정도. 선물로 살까 생각했는데 짐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다. 이후에 관광지가 된 소수민족 마을 인근에서 비슷한 제품을 많이 보았고 가격도 박물관보다 약간 저렴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쿤밍에서 귀국하는 일정이라면 공예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박물관에 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귀여운 -_- 파충류
박물관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통청강에서 거대한 파충류를 보았다. 이구아나 같이 생겼다. 이름을 들었는데 금방 까먹고 말았다. 혀를 낼롬낼롬하고 눈을 껌뻑껌뻑하는 모습이 은근 귀여워서 등을 만져보았다. 파충류는 차가울 줄 알았는데 체온이 따끈해서 놀랐고 거친 감촉이 낯설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박물관에서 본 뎬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했다. 이 지역의 역사와 소수민족, 한족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복잡하게 느껴졌다. 운남 지역은 이미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이 직접 와서 쓸어담은 지역이니, 오래 전에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티벳과 같은 영토분쟁의 소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문화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조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금으로 만든 작은 인장과 한무제 대의 동전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이외의 유물에는 전혀 한자 기록이 없었다. 청동기 유골함에 망자에 대한 기록도 없고 검이나 무기 등에 새겨진 명문도 없었다. 고고학 발굴의 진위여부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까닭은 음모론을 즐겨서가 아니라 중국의 일부 사학자들이 고대왕국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출토품을 보았지만 아무래도 기묘한 느낌이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뎬의 청동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출토된 유물들이 이 지역을 뎬 문명의 중심으로 볼 것인지 중화문명의 변방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된 작은 쇳조각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인식이나 국가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유물들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게스트하우스 베란다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반달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