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30일 월요일

상처.

1. 이유
9월 25일 밤에 길에서 넘어졌다. 얼굴이 까졌다. 내가 소중하지 않구나, 아픈데 깨달았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텅빈 내장을 저주했다. 왜 사는지 몰라서 엉엉 울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갔다. 28일에 다시 한 번 다쳤다. 주말이 지나면서 타박상과 찰과상이 드러났다.


2. 결과
왼쪽 눈가, 입술 옆, 턱에 상처와 멍이 남았다. 왼쪽 팔꿈치와 무릎에 긁힌 자국이 남았고 허벅지에 멍이 들어 부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 출혈이 쉽게 멎질 않아 고생했고 무릎과 발목의 관절이 부어 올랐다. 오른손 손가락 중지와 약지의 관절부위를 다쳤다. 정맥주사를 맞다가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양쪽 팔꿈치 안쪽에 바늘자국이 남았고 왼손 손등과 손목 안쪽 부위에 멍이 들었다. 요 며칠 동안 겪은 사고의 결과. 이렇게 다양한 부위에 외상을 입었던 적이 살면서 있었던가...
그러나 다행스럽게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찰과상과 타박상이 심할 뿐 근골격계는 무사했다. 피부는 너덜거리지만 골절은 전혀 입지 않았다니 내가 바로 통뼈랍니다.

3. 애인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배신당한 거라고 착각했지. 사실은 사랑에 기댔기 때문에 흔들린 것 뿐이지. 출렁이며 지나가는 감정의 물결이 단단한 지지기반이 되어주기를 바랐지. 응원해주기를 바랐지. 인정받기를 바랐지. 위로받기를 바랐지. 스스로의 바람들이 나를 배신했던 것이지.

4. 어머니
탯줄을 안 놓아줘서 내가 잡아당기면 자기가 엎어지고 자기가 잡아당기면 내가 엎어지는 어머니, 탯줄을 안 끊어주는 어머니, 평생 자식의 목 위에 얼굴처럼 올라타 있는 어머니.

- 김언희의 어머니.



개의 죽음.

이동훈이 그린 세티와 주인


세티는 2000년 7월 10일에 태어났고 그 해 8월 31일에 내 동생 이동훈의 생일을 맞아 우리 집에 왔다.

세티의 이름은 9월을 뜻하는 september에서 유래했다. Septy, 쎄띠라고 경음화 하여 부르기도 했다. 이 이름은 이집트 람세스 대왕의 아버지의 이름과도 발음이 같다.

세티는 아름답고 점잖고 품위 있고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수컷 시츄 종의 개였다. 세티는 건강한 근육질의 강아지였기 때문에 함께 분당 중앙공원을 산책할 때면 이 야생마 같은 강아지의 질주를 따라잡기 힘들어 숨을 헐떡일 때가 많았다. 세티는 주인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면 걸음을 늦추곤 했다.

세티는 마지막 저녁에 내내 거칠게 숨을 쉬었다. 그 까맣고 촉촉하고 작은 코에서 압력밥솥에서 김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세티의 작은 몸이 격하게 떨렸다. 세티는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바닥에 구토를 하다가 아무도 쓰지 않는 서재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세티를 엄마가 발견해서 안방 침대로 데리고 갔다. 세티는 엄마 곁에서 놀다가 갑자기 옆으로 푹 쓰러졌다고 한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는 듯 갔다. 세티가 세상을 떠난 시간은 2013년 9월 29일 아침 8시 30분 경이다.

세티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다. 귀에 염증이 생겨서 아파했지만 거의 나아서 다행이다. 지병으로 오래 고생하지 않았고 열네 살이면 개의 수명으로는 천수를 누린 셈이니까 호상이라고 생각한다. 세티는 얼마 전에 미용을 받아서 깔끔한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세상을 떠났다.

생명이 빠져 나간 세티의 몸은 점차 차가워졌다. 그러나 털의 감촉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부드러웠다. 이렇게 부드러운데 싸늘하다니 이상했다. 세티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근육이 경직되어서 눈을 감겨주려 해도 졸린 듯 게슴츠레하게 눈꺼풀이 열렸다. 세티는 혀끝을 조금 왼쪽으로 내민 채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굳어진 작은 턱을 억지로 벌려 혀를 입안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눈을 반쯤 뜨고 혀를 내밀고 있는 세티의 모습은 살아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다만 차가웠을 뿐이다.

세티는 숨을 쉬지 않았다. 더 이상 움찔거리지 않는 그 작은 콧구멍에서 거품 같은 콧물이 흘러 나왔다. 폐가 눌리면서 몸속에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숨이 멎은 뒤에 그 작은 몸에서 똥과 오줌과 폐 속의 거품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생명이란 아마도 똥과 오줌과 거품에 섞여 있는 모양이다. 세티는 그렇게 떠났다.

세티는 좋은 개였다. 세티는 모두에게 충직하고 진실했다. 세티는 개로서 가장 훌륭한 삶을 살았다. 사실 나는 다른 훌륭한 개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와 우리 가족을 이렇게 사랑해준 개는 없었다. 아빠가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달려 나왔던 이는 세티였다. 그리고 엄마가 쓸쓸하지 않도록 나와 훈이가 외롭지 않도록 세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세티는 이제 가장 좋은 미생물과 가장 성실한 벌레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축축한 땅 속에서 세티는 충실하게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막막함.


요즘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할 때가 많다. 새벽 시간에 집중이 잘 되어서 밤늦게 붙잡고 있는 것보다 생산성이 좋다. 쓰다가 막혀도 세월아 네월아 하지 않고, 그러니 아무래도 체력의 소모도 덜하고, 오후에 사람을 만날 약속을 잡기도 편하고, 여러모로 아침이 저녁보다 일하기 낫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잠자리에 일찍 들어가기 어려운 까닭은 해야 할 일들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압박감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때가 자주 있다. 고립무원, 사고무친, 진퇴유곡, 이런 말들이 떠오른다.

2013년 9월 24일 화요일

카페에 그림을 그렸다.

카페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시멘트 노출된 바닥에 수성페인트로 쓱쓱 드로잉을 했다. 이제  그림이 다 마르면 그 위에 에폭시로 코팅을 해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러면 반짝반짝 예쁘겠지.
 
카페 로고와 아이디어 스케치
아이디어가 이 정도 수준이었다능...

카페 들어가는 입구

큼지막한 로고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원두...

핸드 그라인더로 시작합니다.

드립커피를 내리기도 하고요.

프렌치프레스로 우려내도 맛있고요.

하트가 뿅뿅 날아다니는 커피를 마셔보아요.
 
 
바닥에 림 그리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콘크리트 벽에 벽화를 그리는 것과는 많이 다른 작업이었다. 시멘트 바닥이 무척 차갑고 가루가 까끌거려서 조금 고생스러웠다. 붓질을 하다 보니 안료에 시멘트 가루가 섞여서 결국 군데군데 얼룩이 남아 수정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귀여워서 맘에 든다.
 
카페 인테리어 소품으로 나무 조각품을 배치하려고 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줄톱으로 나무판 오려내는 방법을 배웠다. 이 작업이 굉장히 재미있어서 원래 벽화로 처리할까 했던 부분을 조각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아직 색칠하기 전의 나무 글씨 조각.

한쪽면을 색칠한 판재를 오려서 컵 모양을 만들었다.
스무개 정도 만들어서 주르르 늘어 놓아야지.
 
 
내 카페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서 카페 소개글도 썼다.
 
 
"Mit Kaffee" 밋 커피는 독일어로 "커피와 함께"라는 뜻입이다.

독일에 커피가 처음 전해졌을 때 커피를 즐겼던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파리, 로마, 빈에서는 남성들이 카페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지만, 독일의 남성들은 동네 호프집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고 합니다. 남편을 술집에 빼앗긴 독일 여성들이 모이던 장소가 바로 커피하우스입니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낸 것과 달리 독일식 커피는 드립커피 맛과 향이 부드러운 드립커피를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멜리타 벤츠 여사가 세계 최초로 종이필터 드리퍼를 개발했고 이를 시작으로 커피 드리퍼 브랜드 멜리타가 탄생했습니다. 전세계에 보급된 비스듬한 빗면을 가진 도자기 드리퍼는 커피에 대한 독일 여성의 사랑을 보여주는 제품입니다.

미국의 커피 역사에도 독일식 커피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로 차를 마시던 미국에서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독립을 하면서 미국의 차 문화는 커피 문화로 변화했습니다. 차를 마시듯 연하고 부드러운 커피를 마시게 되면서 독일식의 드립커피가 미국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전세계에서 즐겨마시는 아메리칸 스타일 커피의 원조는 바로 독일의 커피인 셈입니다.

저희 밋 커피는 아로마가 풍부한 블랜드 드립커피와 신선한 에스프레소 베이스 커피 그리고 다양한 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커피하우스와 같이 고객님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 오픈 예정, 무사히 끝나기를...

무선인터넷 문제.

무선인터넷 문제가 생겼다. 유선으로 연결하면 가능하지만 와이파이는 인식하지 못한다. 2009년에 구입해서 5년이 되도록 주구장창 사용해 온 델 인스피론 1545. 그동안 잔고장 한 번 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이폰 핫스팟으로 인터넷에 연결하고 검색을 시작했다.

클리앙에서 백신 프로그램 아바스트를 썼더니 인터넷이 불안정해졌단 글을 보고 일단 아바스트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http://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18808495 여기 댓글에 보면 전자렌지의 마이크로웨이브가 무선인터넷 통신전파에 간섭한다는 내용이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 아바스트를 지운 뒤 무료백신 찾다가 아비라로 교체했는데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격하게 구리다는 점만 제외하면 괜찮은 프로그램인 것 같다.

하지만 백신프로그램 삭제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장치관리자에서 네트워크 어댑터 항목을 확인해본 결과 아바스트 방화벽 NDIS 필터 미니포트에 경고등이 들어와 있었다. 하나씩 수동으로 제거했다. 그래도 무선인터넷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노트북 제조사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네트워크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다운로드받아 재설치했다. 무선랜카드는 인텔 와이파이 링크 5100 agn, pci컨트롤러는 마벨 유콘, 두 개의 드라이버 파일이 다운로드 완료되는 순간 전화기가 울렸다. 데이터 사용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의 문자메시지였다. 헐; 게다가 드라이버 재설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델 기술지원팀에 전화를 걸었다. 친절한 상담원과 전화로 이런저런 과정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원격으로 서포트 해주겠다고 한다. 부끄럽지만 컴퓨터를 내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작 바탕화면 정리라도 해둘 것을 그랬다. 설마 *.avi 이런 걸 검색해보진 않겠지... ;ㅇ;

상담원이 장치관리자를 살펴보더니, F2 키를 눌러보란다. 이 노트북은 무슨 생각인지 F~키는 펑션키와 함께 조작해야 동작하는 걸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F~키와 위치를 공유하는 볼륨조절이나 화면밝기 조절 등의 기능을 가진 단축키가 기본으로 설정되어 있다. 첨에는 이것 때문에 엄청 불편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F~키를 사용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보니 F2자리에는 무선랜 on/off 단축키가 있었다. 키를 누르자 마법 같이 와이파이가 연결되었다. 무선랜이 작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만 무선랜을 꺼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평소에 무선랜을 꺼놓으면 전원이 절약된다거나 통신보안에 유리하다거나 무언가 장점이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한 번도 이용해본 적 없고 맨날 들여다본 노트북에 그런 단축키가 있는줄도 몰랐다.

그러니까, 고객님 모니터가 켜지지 않는다면 전원버튼을 눌러보세요~ 우왕ㅋ 화면이 켜졌어요~ 뭐 이런 상황. 결국 무선인터넷 문제를 해결해서 기쁘긴 하지만 마냥 기쁘지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함무라비 협정.

"자기는 내가 좋아?"
"좋아."
"같이 살고 싶을 만큼?"
"응."
"만약 나랑 같이 사는데 내가 맨날 술 먹고 돈도 안 벌어다주고 막 때리고 그러다 집 나가고 그러면 어떡하려고?"
"그럼 나도 술 먹고 돈 안 벌고 맞서 싸우고 집 나갈 거야."

그는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좋은 아내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몰라 두렵다. 그러나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한대도 존중받지 못할 때는 있지만 반대로 상대를 함부로 대한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이지. 그러니 조심하는 수밖에.

상처와 분노.

상처 입은 사람의 무기력한 분노가 얼마나 난폭해질 수 있는지 알겠다. 선량한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9월 22일 일요일

뉴요커의 결혼상담.

K양: 언니 H랑 친해?
나: H를 많이 좋아하지만 친하다기는 좀 글치. 
K양: 걔 결혼하고 심도있게 얘기해본적 있어?
나: 결혼하기 전에 외국인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던 적은 있어. 
K양: 외국인이랑 사는 거 어떻대? 걔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걔랑 말해본게 억만년쯤전인듯. 
나: 김치를 못먹는대. 그외에는 딱히 외국인이라 뭐 어떻다는 생각은 안드네. 
K양: 김치야 뭐 나도 안먹고사니까. 
나: 외국인이 결혼하자고 그래?
K양: 애인이 요즘 너무 심각하게 굴어서 덜컥 겁이나네. 
나: 애인은 남자야?
K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미국인 애인은 막 레즈비언일수도 있을거같고 ㅋ
K양: 뉴욕이 게이결혼 합법이 되긴 했지만... 내가 게이타운에 살긴 하지만...
나: 애인이 남자면 한국에서도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어. 
K양: ㅋㅋㅋ 외국인하고 같이 사는데 문제는 없고?
나: 그보다도 남자랑 같이 사는 게 큰 문제 아니겠나 싶다.
K양: 내 말이. 방구도 맘대로 못 뀌고.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추석 장보기.

1.
나: 마트 가려는데 아빠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빠: 있긴 있지.
나: 뭔데요?
아빠: 사위.
나: ... 원 플러스 원으로 팔면 집어올게요. 
아빠: 사위는 하나면 되니까 사위 플러스 손자 세트로 집어와라. 
나: 헐...

2.
엄마: 왜 양말 세 켤레씩 묶어서 파는 선물세트 있잖니. 그걸 좀 사와라. 
나: 몇 세트나 필요하신데요?
아빠: 하나만. A 주게. 
엄마: 아니 A씨만 주면 어떡해? B씨, C씨, D선생도 같이 만날 텐데.
나: 그럼 4세트 사와요?
엄마: 그리고 E씨랑 F씨도. 이웃사촌이라고 옆집 사람들은 챙겨야지. 
아빠: 그렇지. 당신이 나보다 낫네. 하는 김에 G랑 H, I 네도 챙길까?
나: 그럼 9명 분인가요?
엄마: 응. J형님하고 K네도 그냥 넘어가긴 그런데...
아빠: 생각해보니 L한테도 해야겠어. 지난번 일 봐준 걸 따로 사례하긴 그렇고 말이지.

그리하여 마트에서 양말 12세트를 사들고 돌아왔다. 

2013년 9월 14일 토요일

글쓰기와 여행.

집을 떠나 있으니 확실히 생산성이 높아진다. 마음이 편안해서 잡념이 사라지니 집중력이 좋아진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손에 들어와서 읽고 있는데 작가의 말이 이렇게 시작한다.

"매달 월말이면 보따리를 싸들고 열흘 정도씩 집을 비웠다. 그러다 보니 3년 세월이 흘러갔다. 그것은 태백산맥을 넘는 동반자 없는 등반이었다. 그 세월은 이제 4,500매의 원고로 쌓여 작품 태백산맥의 제 1부가 되었다."

열심이 돌아다니고 열심히 써야지. 새삼 다짐해본다.

예술과 정치.

작곡가 류재준은 이번 난파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친일파 음악인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음악상의 수상을 거부했다. 일부에서는 음악과 정치는 무관한 것이라며 류재준의 결단을 비난하고 있다. 물론 예술이 정치와 무관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나 상을 제정하고 수상자를 지정하는 과정은 분명 정치의 영역에 속해있다. 류재준의 올바른 정치적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음악에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에는 감탄을 보낸다.)


이미지 출처 류재준 공식홈페이지 http://jeajoonryu.com




홍난파의 친일행적에 관해(아이엠피터 블로그 포스팅)

관련기사(한국일보 김소연기자)


서비가.

동생이 보내준 작자미상의 노동요.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연재소설가1)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불려진 노래라고 한다.

書婢歌 서비가

婢婢書婢 노예야, 노예야, 글노예야
不食書書 먹지도 말고 써라
不遊書書 놀지도 말고 써라
不休書書書婢 쉬지말고 써라 글노예야
少寢多書書婢 잠은 조금만 자고 써라 글노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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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세기 조선의 신분제도는 갑오개혁 이후 자유시민과 작가로 나누어졌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작가계급이 세분화 되었는데, 자기계발서작가, 인기TV드라마작가, 베스트셀러작가, 아마추어팬픽작가, 연재소설가로 세분화 되었고 이 중 연재소설가는 불가촉천민으로 분류되어 사회로 격리되어 자판기처럼 글을 썼다.

2013년 9월 10일 화요일

진혁과 그의 가족에 관하여.

1.

진혁이란 이름의 소년을 만났다. 막 중학교에 입학한 나이였다. 키는 또래에 비해 컸지만 얼굴에는 보송보송 솜털이 남아 있어 어린애 티가 났다. 진혁을 보면 십대 초반에 누구나 겪었을 법한 혼동과 불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애의 가느다란 눈매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수줍음이 많아서 다른 사람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일상적인 대화에는 어우, 씨바, 존나, 같은 십대의 감탄사를 풍부하게 섞어 빠르게 말했지만, 긴 문장으로 이야기할 때는 말을 더듬었다. 그런 아이의 과외교습을 맡게 되었다. 나로서는 고수입의 과외 아르바이트 자리를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진혁이네 집에 처음 갔을 때 그애가 나에게 했던 이야기는 대부분 우리 누나가요, 라고 시작했다. 진혁이의 누나 지혜는 중학교 삼학년 여학생으로 확실히 돋보이는 아이였다. 지혜가 밝은 얼굴로 현관문을 열어주었을 때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진혁이와 아이들 아버지와 함께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지혜는 부엌에서 차와 과일 같은 것을 내왔다.

집안 사정을 들어보니 아이들의 어머니는 진혁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뒤로 장녀인 지혜는 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여러 노력을 해왔던 것 같았다. 진혁이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본 시험 성적이 그리 좋지 않자 과외를 시켜달라고 아버지에게 청한 이도 지혜였다고 했다. 지혜는 중학교 삼 년 내내 반장을 했고 성적도 좋으며 자기 일은 스스로 잘 알아서 하기 때문에 신경을 쓸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딸 자랑이 이어졌다. 그에 비해 아들에 대한 평은 꽤나 냉정했다. 진혁이는 다른 애들에 비해 키만 빨리 컸지 속은 늦게 여무는 것 같다고 했다. 진혁이는 그런 말을 바로 옆에서 들으면서도 속없이 실실 웃기만 했다. 확실히 진혁이는 말랑말랑한 아이였다.

그 집을 드나들면서 지혜가 익숙하게 집안 살림을 돌보고 제 동생을 챙기는 모습을 보았다. 지혜는 컴퓨터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동생을 어르고 달래서 책상 앞에 앉혀 놓는 일도 맡아서 했다. 누나의 조력이 없었다면 나 같은 대학생 과외선생이 아니라 경험 많고 유능한 전문 강사라 해도 진혁이를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학교 일 학년의 남자아이는 인류의 진화발달 단계에서 호모사피엔스 같은 고생인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진혁이가 또래에 비해 학업에서 뒤쳐지는 편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성장기의 아이에게 현생인류 평균의 지적 이해도, 공감 능력, 책임감, 성취만족도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과외수업은 매 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여덟 시부터 열 시 까지였다. 진혁의 아버지는 보통 저녁 아홉시 반에서 열 시 사이에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그도 어색했는지 밖에서 입던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거실 소파에 앉아서 내가 수업을 마치고 아들의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면 현관문을 열고 따라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는 늦은 시간인데 위험하지 않겠는가, 하며 차로 데려다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나는 걸어서 십 분 거리인데요, 하며 사양했다. 사실 우리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이십 분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지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 달 정도 반복되고 나서야 그는 나의 귀가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 익숙해지자 진혁이 아버지도 과외선생을 상관하지 않고 귀가하자 마자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과 부엌을 돌아다니고 냉장고를 열어 무언가 꺼내 먹기도 했다. 진혁이 방에서 수업을 하다가 방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 이제 나도 슬슬 수업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2.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갈 무렵 집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벨이 멈추고 잠시 후 지혜가 전화기를 들고 방으로 왔다. 전화를 넘겨받아 보니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오늘 저녁에 일이 많이 늦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귀가할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겠다고 자청했다. 대학생 과외선생이란 가정교사와 베이비시터의 중간쯤에 있으니까, 어차피 밤은 늦었고 다음날 특별한 일도 없었으니 몇 시간 정도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 진혁이는 컴퓨터 앞으로 달려갔고 지혜는 딱 한 시간만 게임을 하는 거라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받아 놓았다. 진혁이는 게임을 하고 지혜와 나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 나란히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지혜는 아빠가 과로하는 것 같다고 걱정을 염려하는 말을 했다. 게임중독이란 말을 쓰면서 진혁이를 걱정하기도 했다. 지혜는 제 또래의 아이를 둔 중년여성 같이 말했다. 나도 덩달아 지혜를 다른 과외 학생의 어머니 같이 대하고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표정을 가릴 수 없는 민낯이라면 중년여성의 얼굴은 용도에 따라 골라 쓰는 탈바가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지혜는 능숙하게 가면을 썼다. 지혜는 사교적인 동작을 흉내 냈고 의례적인 어휘를 사용했는데 그런 태도가 어색하지 않았다. 지혜가 과외선생을 상대하며 엄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와중에 지혜보다 고작 두 살 어린 진혁이는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에서 하드바를 꺼내 물고 스타크래프트를 했다.

지혜는 진혁이의 학교생활, 성적, 컴퓨터게임 같은 것에 대해 상담했다. 진혁이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고, 다른 친구를 고려하지 않으며 장난을 치고, 누나가 짜증을 낼 때까지 우스꽝스러운 말장난을 반복하고, 재미있는 일을 할 때는 공부 따위 잊어버리고 마는, 지극히 평범한 중학생 소년이었다. 지혜는 진혁의 습관과 태도를 문제 삼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누군가가 진혁이의 사소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혁이에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살 터울의 누나가 그애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좋지 않아 보였다. 나에게도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우리 남매는 같이 컴퓨터게임을 했고 함께 또는 따로 사고를 치고 다니며 친구 같이 성장했기 때문에 지혜의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로서는 반대로 지혜의 조숙함이 걱정스러웠다.

진혁이 아버지는 자정을 넘긴 시간에 집에 들어왔다. 그는 지친 모습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넥타이를 풀어 소파에 걸쳐 놓고는 곧바로 나를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고 피곤하기도 해서 나 역시 그 날은 사양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진혁의 아버지와 단 둘이 있으며 나는 그와 결혼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이 남자의 아내가 되어 지혜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덜어주고 진혁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싶다는 상상, 내가 그 가족의 구원자가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진혁이 아버지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이 아니었고 아저씨가 보기에 나는 딸 같은 어린 계집애였을 것이다. 나는 지혜보다 단지 여섯 살 많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물한 살, 막 성년이 되었던 시기에 나는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애정으로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덧없는 상상이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생겨버렸다. 아둔하고 주의력이 부족한 진혁이와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취향이 까다로운 지혜, 아무리 생각해도 골치 아픈 아이들인데 내가 잘 해나갈 수 있을까 두려웠다. 진혁의 아버지가 나에게 청혼할 리가 없음에도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상상이 나를 두렵게 했다. 그리하여 이 시나리오는 그를 거절하고 배신하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주말동안 아이들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고안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3.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진혁이네 외가는 차로 삼십 분 거리의 이웃 도시에 있었는데 진혁이와 지혜는 외조부모와 친밀했다. 특히 지혜는 외할머니를 무척 따랐다고 들었다. 아이들에게 외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이 지나고서 아이들을 만났다. 지혜는 단발머리에 흰 리본이 달린 머리핀을 꽂고 웃지 않는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진혁은 컴퓨터 앞에 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아이들에게, 특히 지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죽음이 진혁이가 스타크래프트의 세계에 더욱 몰입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상공간에서 저글링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일이 죽음에 대한 성찰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혁에게도 물론 충격적인 일이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런 상실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겉보기에 진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혜는 사춘기의 소녀였고 어머니의 죽음에 이어 외할머니의 죽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여성 질환이 자기에게도 유전될 거란 불안감도 깔려있었던 것 같다. 나는 유방암이 유전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 확률이 높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한 번은 지혜가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저는 우리 엄마 같이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스물여덟 살에 아이를 낳을 거예요.

다만 결혼과 육아에 대한 사춘기 소녀의 상상에서 나온 이야기였을까, 제 어머니 같이 요절하고 마는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것일까, 그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엄마 같이 살겠다는 딸의 말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급하게 대답할 말을 찾았다.

엄마 때는 그랬지만 요즘 스물다섯 살은 너무 빠른 나이야.

지혜는 중년여성 같이 가면을 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그러다가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할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지혜의 얼굴은 너무나 밝고 명랑했다. 하지만 잠시 딴청을 피우거나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해서 지혜가 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때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다. 텅 빈 민낯을 감추려고 환하게 웃는 가면을 쓰는 일은 좀 더 나이를 먹고 난 뒤에 시작해도 될 텐데, 재빨리 가면을 갖춰 쓰는 일은 꽤나 힘이 들 텐데, 나는 지혜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내가 괜히 이 아이 앞에 나타나 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지혜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했다. 지혜가 스물다섯 살에 결혼을 했을까 문득 궁금하다.

4.

화요일과 목요일에만 했던 과외는 하루 더, 토요일까지 하기로 했다. 나로서는 수입이 늘어 나는 일이 반가웠지만, 수업시간이 늘어나도 진혁이의 성적은 오르지 않았다. 진혁이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아들에 대한 기대가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석차나 점수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밤 시간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베이비시터, 주기적으로 자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말상대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귀가하면 진혁이는 책을 덮어놓고 밖으로 달려 나가곤 했고, 나는 진혁이가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다시 방으로 불러들여 수업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아이 아버지는 수업 시간을 끝까지 다 채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가끔은 내가 그 집을 떠나고 가족들만의 휴식시간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기색을 내보이기도 했다. 나 역시 퇴근이 싫을 리 없었지만 지혜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혜는 수업시간이 지켜져야 한다고 고집했고 우리들 중 누구도 지혜의 의견을 거스를 정도로 용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달리 지혜는 진혁이의 성적에 민감했다. 마치 동네의 다른 아줌마들이 자기 아들을 챙기듯 진혁이를 챙겼다. 둘은 같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여느 엄마보다도 나은 면이 있었다. 지혜는 정확한 시험 일자와 출제범위를 알고 있었고 담당 교사들의 경향도 파악하고 있었다. 진혁이란 녀석은 기말고사가 언제니? 라고 물으면, 어... 언제였더라... 다음주 수요일, 아니 화요일인가... 이런 식으로 어물어물 넘어가고 말았기 때문에, 나는 지혜의 도움이 없었다면 과외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조금 초조했다. 진혁이의 성적이 적어도 과외를 시작하기 전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를 바랐다.

지혜는 자기의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중학교 시절 내내 성실하고 인기 많은 아이였음에도 고등학교 진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종종 동네 선배인 나에게 고등학교 때의 일을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비평준화였던 시기에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서열화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있었는데 지혜는 반대로 그런 상황을 부러워했다. 고교입시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시험 날의 실수로 원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이 느낀 패배감이 어떠했는지 설명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애는 우수함을 인정받기를 원했다. 기숙사가 있는 외고에 원서를 넣어보고 싶어 했지만 진혁이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딸이 외고에 가겠다고 고집했다면 말리지 않았을 테지만 그애가 기숙사 학교를 포기하고 가까운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결정하자 내심 안도하는 것 같았다.

진혁이네 가족은 모두 지혜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아침에 밥을 짓는 일은 아이들 아버지가 했다지만 마트에서 조리된 반찬이나 인스턴트 식품을 사다가 냉장고에 채워 놓고 그릇을 꺼내놓는 일은 지혜의 몫이었다. 가족의 규칙에 따르면 설거지와 뒷정리는 진혁이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혜가 잔소리를 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알아 해치우고 마는 때가 많았다. 지혜는 가사노동 외에도 가족들을 위해 감정의 많은 부분을 투자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어머니가 할 것 같은 잔소리를 했고 아버지에게 마치 부인이 할 것 같은 잔소리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가끔 지혜는 가족들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여러 모로 재주가 많은 아이였지만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방법은 도무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그 나이를 지나왔지만 내가 알고 있는 소녀는 나였을 뿐이라 지혜에게 무언가 이래라 저래라 조언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내가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춘은 이유 없이 화내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이 웃는 시기이다. 자기가 해놓은 일을 자랑하는 때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꿈꾸는 때이다. 지혜는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외롭게 버텨내고 있었다.

5.
기말고사가 끝난 토요일, 과외수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진혁이네 가족은 외가에 방문할 거라 했다. 무사히 학년을 마쳤으니 쉬어도 좋을 때였다. 다음주 화요일에 진혁이의 시험지를 가채점한 결과를 보았다. 석차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절대평가 점수로는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나는 쪽집게 과외선생이 아니었고 지금도 자기가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는 이상 성적을 올리는 비법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오랜 시간 책상 앞에 붙잡아 두었던 학생인데 결과가 이래서야 부끄러운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혁의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오셔도 됩니다. 이 무슨 말인가 당황했다. 그는 방학을 맞아 일자리를 잃은 과외선생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 역시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늦은 귀가 후 자동차 안에서 갑자기 그들에게 일어난 가족의 문제를 털어놓았다.

그의 장인은 장모가 세상을 떠난 뒤 침울한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에게 너무 자주 찾아오지 말라고 했단다. 그는 장인이 자기를 배려해서 하는 말인 줄 알고 혼자 되셨는데 가까이에서 지내자고, 원한다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인의 입장은 달랐다. 지혜가 어릴 때는 친탁을 했다는 평을 들었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제 어머니를 ·닮아 간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손녀에게서 죽은 딸의 모습을 보는 일이 무척 괴롭다고, 장인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사위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홀아비가 된 두 사람의 만남이 서로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고 했다.

진혁이 아버지는 장인에게 하지 못한 말을 나에게 했다. 장모가 계실 때에도 반찬을 얻으러 갔던 건 아니었다고, 당신의 혈육을 보기 싫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죽은 아내를 닮은 딸애를 자기는 매일 보고 있다고, 토하듯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절절하게 섞인 비애에 공감했지만 한편으로 지혜의 고통스러운 자기학대적 잔소리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혜의 아버지가 장인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인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아내가 죽고 그의 장모가 죽은 뒤에 그가 내 앞에서 자기 장인에 대해 묘사할 때의 느낌은 마치 벌레나 강아지풀에 대해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장인이 자기와 아이들을 거부하는 이유가 마치 그의 아내, 즉 장인의 딸에 대한 배신인 양 묘사했다. 하지만 장인이 느끼고 있을 깊은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아픔, 그 딸애와 비슷한 아이의 성장과장을 다시 한 번 목격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공포, 심지어 그 조차도 이해하고 있을 법한 아내를 잃은 남편의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다만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을 받기 위해서 굴종적인 태도를 취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고용된 과외교사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장인에 대해 말할 때 그가 느꼈던 공포를 이해했다. 그는 고립되어 있었다.

진혁과 지혜, 그들의 아버지는 이 도시를 떠났다. 아버지의 부모가 살고 있는 지방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자기 아이들을 보살피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성실한 아버지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결과 진혁이와 지혜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순수한 전래동화 이야기

동생과 채팅 중, 새로 나온 채팅 프로그램을 보고 신기해하자...

동생: 토끼가 달나라에 가는 세상인데 뭐 이런 정도 쯤이야.

나: 꺅 토끼가 갔대? 벌써?

동생: 추석이 대목이라
엄청 떡치고 있는데
토끼라서


나: 아풀싸...

동생: 내 워딩은 숨겨진 더러운 뜻같은건 없어
그냥 순수한 전래 동화로 해석해야해


그렇다고 합니다.

2013년 9월 9일 월요일

환경의 변화와 글쓰기.

1.

밖으로 나가면 도라지와 콩이 자라는 밭이 보인다. 눈이 푸르니 좋다. 공사장에서 들리는 소리도 싫지 않다. 비가 오는데도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경외심이 든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꿈이었다. 앞머리를 정성스럽게 가지런히 빗어내렸다. 현실에서 머리모양을 다듬느라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는데 꿈에서는 오래도록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기분 좋게 잠에서 깼다. 스스로를 보살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간밤에는 매실주를 마셨다. 과일주에 취약한 체질인데 매실주를 그렇게 많이 마시고도 뒤끝이 없다니 신기하다. 닭죽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켰다. 이제 일을 해야지. 여섯 시간 동안 내달리면 한 권 분량은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2.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떨이로는 뚜껑이 달려 있는 캔커피 빈 통을 활용하고 있었다. 담배를 한 모금 마시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고 재떨이가 되어버린 캔커피를 무심코 집어 들었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춥지만 따듯하고 시끄럽지만 고요하다. 마음의 문제. 내 안으로 도피하는 중.

4.

모든 사람들이 이불을 나누어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철수는 안타까웠다. 부족함이 적다면 과연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까? 소유욕 또는 사적 만족감을 충족할 수 있을까?

5.

어느 글쟁이가 자신을 글쓰는 자판기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입금이 되면 원고가 또르르 굴러 나온다는 이야기. 그때는 웃고 넘어갔는데 지금 내 상황이 그러한 듯. 또르르 또르르 두 권 정리해서 보내고 다음주를 준비하고 있다. 또르르 막힘 없이 나오기를...

6.

녹색이 많이 보이는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확실히 이명은 줄어 들었다. 그런데 파리와 모기가 많다. 산모기라 그런지 모기에 물린 직후에는 엄청 크게 부풀어 오르고 심하면 통증을 느낄 때도 있다. 파리 모기 외에도 벌레가 많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나방이 내 몸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걸 보고 기겁했다. 사람에게 좋은 환경이 벌레에게도 좋은 환경이겠지. 귀찮아도 좋다.


배신자가 필요한 체제.

국가주의(또는 민족주의)가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을까? 국가에 대한 사랑을 강제하는 것과 신에 대한 사랑을 강요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배신자가 필요한 체제는 부도덕하고 허약하다."
이석기 내란음모예비사건을 보며

대한민국에 간첩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져야 한다. 마트나 교회, 절, 공장, 회사, 군대 모두에 북한간첩, 미국간첩, 일본 간첩, 러시아 간첩, 영국 간첩, 프랑스 간첩, 독일 간첩 들이 득시글 거려야 한다.

이 간첩들이 박멸해야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받아들여져야 한다.

간첩들이 아무리 설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현명해져서 간첩들 스스로 '나 이제 간첩 안 할래. 힘들고 쪽팔려. 대한민국 사람되어서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차 마시며 이웃과 편하게 이야기도 하고 자녀들도 잘 키울래!'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배신자가 필요한 체제는 부도덕하고 허약한 체제일 뿐이다.

페이스북 이재익 선생님의 글.

방사능 공포를 괴담으로 치부하지 말라.

부산에 수입되는 일본산 수산물은 4%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수산물을 팔고 있는 가게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식료품 유통현황을 파악할 수 없는 시민들이 느끼는 공포를 외면하고 감히 인터넷 괴담 운운하는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왔는가? 부산 자갈치 시장 상인들이 살 길은 일본산 수산물 유통의 전면금지 조취뿐이다.

http://media.daum.net/issue/226/newsview?issueId=226&newsid=20130908145707233

신체의 정량화.

나: 하루에 8시간은 자야하는 것 같아.

친구: 그 정도면 충분해?

나: 아니. 최소한 8시간 정도는 잠을 자야 제대로 움직인다고. 10시간쯤 자면 만족스럽고.

친구: 역시...

나: 그리고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이 한계인 것 같아. 그 이상 붙잡고 있어봐야 쓸모 있는 결과물이 안 나오더라. 8시간 풀근무하고 나면 완전히 진이 빠지잖아. 그 이후에는 몸을 쥐어짜는 거고.

친구: 그렇지.

나: 이런 식으로 신체를 정량화해보면 재미있겠다. 일테면 한 달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9권이 한계인 것 같아.

친구: 어떻게 알아?

나: 예전에 한 달에 10권 읽기 프로젝트를 했는데 매 달 1권씩이 남아서 결국 몇 달 하다가 포기했거든. 사놓은 책도 다 못 읽는데 더 사들이지 말자 하고. 그때 9권 읽기 프로젝트를 했으면 성공했을 텐데. 지금은 도서관에서 2주에 4권씩 책을 빌리는데 대략 비슷한 양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친구: 그렇구나. 섹스는?

나: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친구: 나는 평균 내면 주에 3회 정도.

나: 정말? 너는 훨씬 화려할 줄 알았는데.

친구: 물론 그 이상 하기도 했지만 그건 감정의 소모에 해당하는 일이지 육체의 발현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나: 응. 주에 두세번 쯤 하는 게 안정적이지.

친구: 그럼 술은?

나: 술은... 정량화가 안되네.

2013년 9월 3일 화요일

소모적인 욕망에 대한 대화.

친구: 전엔 허전하면 술을 마시고 여기어디 나를 외롭지않게 할것들을 찾았어.
근데 지금은 이게 날 채워줄수 없단걸 알겠네.
뭔가 소모적인 세계에서 유리된 기분이야.
나쁘진 않은데
늙은것 같다.

나무: 아이 갖고 싶어.

친구: 나도.

나무: 나는 허전해서 많이 먹었나봐.
몸속에 무언가 쑤셔넣고 채워넣고 싶었나봐.
저녁에 폭식하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네.

친구: 보통 허전하면 폭식하게 되지.
자지를 넣거나.

나무: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은 사랑을 주고 싶은 걸까 받고 싶은 걸까 모르겠어.
후자라면 최악의 엄마가 되겠지. 전자라도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지만.

친구: 좋은 엄마가 될 거라서 아이를 낳는 엄마는 없어.

감정의 진공상태.

좌절감이 컸다. 그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고 느꼈다. 전력을 다해서 장벽을 치고 있다고 느꼈다. 그에게 속삭였던 사랑의 말들은 무가치해졌다. 그는 그런 말을 한 번도 원했던 적이 없었다. 나의 황홀감에 도취되어 그에게 역겨운 말들을 내뱉었던 것이었다. 스스로가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느꼈다. 언제나 엉망이었다고 자책했다. 꽤 자주 멍청한 일을 저지르지만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닌데 그 순간에 나는 최악이었다.

삶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것이 내가 믿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단단하게 내면에 들어 있다고 믿었던 감정이 무너졌다. 모래처럼 파도에 쓸려갔다. 결국 중심이 텅 비고 말았다. 감정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반짝이고 아름다운 존재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오래 지속될 리가 없지. 그렇게 뜨거운 감정이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구나 깨달았다. 달콤한 말들은 텅 빈 공간에서 울리다 사라졌다. 삶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충전하고 그것이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짓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끔찍했다.

아침에 그를 만나러 갔다. 그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다. 별다른 대책이 없었는데 다행히 그는 문을 열었다. 그가 왜 그토록 열성으로 닫아 걸었던 문을 그 순간 열어 주었던 것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전에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굳이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알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두렵다.

그에게 선물을 부탁했다. 당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나에게 달라고 말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하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다. 과연 이런 방법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회복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문득 그 텅 빈 감정이 떠오르고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강박증.

처음 계획하고 약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어진다. 일종의 강박증인 것 같다. 시작이 틀어지면 이후의 진행도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아 두렵다. 약속시간이 자꾸 엇갈리는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고, 마침 식재료가 떨어져 원하던 음식을 주문하지 못하게 된 식당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고,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는 진행하고 싶지 않고, 톱니바퀴가 하나 어긋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끝장이 날 것만 같다. 하지만 이래서는 아무 일도 못하지 싶어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


오늘의 시작이 그랬다. 오후 세 시에 약속을 잡아 놓았다. 한 시간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나가면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협조문서를 이메일 전송하는 과정에서 일이 조금 늦어졌고 그 결과 커피를 못마신 채 허둥대며 달리다가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 지하철을 다시 갈아타고 경로를 수정한 뒤 시간을 확인하니 두 시 반, 아무래도 약속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 거래하는 출판사에 계약서 쓰러 가는데 지각이라니, 그냥 구두계약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전화해서 무엇이든 변명거리를 대고 못 간다고 말하고 싶은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시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내 입장에서 이왕 늦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나간 잘못들 자책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저쪽 편집자 측에서도 작가가 삼십분 쯤 늦게 도착하는 편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완벽한 인간인 척 할 필요 없어. 그건 사실이 아니고 위장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자위해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서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울렸다.


삼십 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기다려준 사람들의 반응은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정도였다. 아무도 화내지 않았고 책망하지 않았다. 장난 섞인 핀잔도 듣지 않았다. 반대로 환영을 받았고 앞으로의 거래도 잘 해보자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글쎄,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는데 삼십 분 정도 늦었다고 해서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당원의 자세.



"저는 녹색당을 지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녹색당이라는 이름없는 정당에게 투표해 주신 103,811명이 너무 소중한 씨앗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들과 함께 녹색당을 소중하게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8번의 투표를 하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최소한 한 번은 녹색당에 투표핳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분들이 절망하지 않고 투표소로 가야 할 이유를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 나가야만 2016년 총선에서 원내진입도 가능할 것입니다."




ㅡ 하승수,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녹색당의 이름을 알리고 우리의 지지자들에게 투표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 정당투표인 광역비례대표 후보를 최대한 등록하자는 내용의 호소문.




ㅡㅡ 버스에서 다시 읽다가 울컥해서 찔끔찔끔 울었다. 광역비례 후보 공탁금이 삼백만원 한다는데, 아, 돈을 벌어야지...







단체문자를 보내고 나면 두근두근해진다.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언제쯤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누가 제일 먼저 답을 해줄까, 어떤 의견이 돌아올까, 하앍하앍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두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