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0일 토요일

그림형제 독일민담.

이혜정, 그림형제 독일민담 - 새롭게 풀어보는 상징과 은유의 세계, 뮤진트리, 2010

작나무의 작은나무: 오늘의 망상 : 돌과 여자 - 이런 망상에 이어, 이 책은 아주 흥미로왔다.  몇 가지 더 발췌.

1.
그림Grimm형제의 메르헨Maerchen은 '민담'으로 해석, 주로 전래민담Volksmaerchen을 의미함. 창작민담은 kunstmaerchen. / KHM : Kinder-und Hausmaerchen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민담은 1812년 12월 25일 출간,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후 1857년까지 7차례에 걸쳐 증편과 개편이 이루어짐.

2.
개구리 왕 또는 충직한 하인리히 (aka 개구리 왕자)에서 1815년의 판본에는 밤에 개구리가 공주의 방문을 두드리자 공주가 "아, 개구리 내 남편이 왔구나."하며 아무 거부감 없이 문을 열고 동침한 뒤 다음날 아침에 왕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그러나 다른 판본에서 공주가 개구리를 역겹게 여기며 침대에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개구리를 벽에 내던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험론에 근거해보면 공주의 난폭한 행동은 충분히 납득할만 하다. 처녀에게 남자와의 동침이란 얼마나 공포스럽고 역겨운 느낌인가! 특히 남성 생식기의 모양은 개구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아아, 개구리, 너님 참으로 남자답구나.

3.
장미아가씨 (aka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무시간성' 100년이 동안 공주와 성 안 사람들의 시간은 멈추어있다가 저주가 풀리는 순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재생된다.
그림형제는 마녀Hexe라는 외국어 대신 무녀, 현명한 여인 Die weise Frau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때 현명한 여인은 여자마법사나 산파 같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

1634년에 출간된 바실레의 <<펜타메로네>>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었는데, 여기에 수록된 <해, 달, 그리고 탈리아> 이야기는 그림형제나 페로의 민담보다 노골적인 내용이 실려있다. 물레바늘에 찔려 잠든 공주에게 반한 왕자가 공주를 깨우지도 않고 일단 사랑을 즐긴다. 그 결과 공주는 쌍둥이를 임신하는데 왕자는 임신한 공주를 내버려두고 도망을 친다. 공주는 여전히 잠이 든 채로 쌍둥이를 출산, 쌍둥이 중 하나가 배가 고파서 공주의 손가락을 빨자 물레바늘이 빠져 공주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내용이다.

공주가 물레바늘에 찔려 피를 흘린 것은 월경의 상징이라 볼 수 있으며, 100년 동안의 잠은 모의 죽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춘기 소녀가 (배우자를 만나기까지) 심리적으로 성숙해가는 기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 잠겨있는 작은 방을 여는 것은 성적인 경험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어쨌든 장미 아가씨가 계단을 올라가 작은 방에 이르는 것은 성적인 인식에 도달했음을 나타낸다고. 탑 꼭대기에서 만난 노파의 존재는 여성에게서 여성으로 계승되는 월경의 저주를 보여주고.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 모든 사건에서 중심에 여성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박해받고 감금당하는 주인공도 여성이며 저주하는 적대자도 여성이고 최후의 보호자 역시 여성이다. - 그러나 아가씨를 구원해주는 자는 남성, 또는 남자가 뿌린 씨앗이 잉태된 아기라는 점, 역시 흥미롭다.




봄 꽃.

어쩌다 보니 구근식물을 키우게 되었다. 러넌큘러스는 꽃대가 하나 올라왔고, 작약은 이제 막 순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새순과 피어나지 않은 꽃몽오리는 한없이 아름답다. 매일 설렌다.



 
 

외로움은 움직임이다.


'외롭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다. 활달히 움직이고 있는 동작동사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의 상태를 못 견디겠을 때에 사람들은 '외롭다'라는 그 낱말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을 발화한다. 그 말에는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이미 움직여 대는 어떤 에너지가 담겨 있다. 그 에너지가 외로운 상태를 동작 동사로 바꿔 놓는다.

김소연, <마음사전>, 마음산책, p.91.

바그너와 영토적 모티프.

1.
바그너는 예수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었다고 주장했을 정도의 꼴통 반유대주의자였는데, 그의 작품은 어쩌면 이렇게 혁신적인지! 꽤 많은 경우에 예술가의 꼴통짓과 예술적 성취에는 별 연관이 없는 것 같다.

김원철 '꼴통'이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였다고 봅니다. 반유대주의를 이용해 먹었을 뿐이라는 얘기죠.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음악 이야기: 바그너 색깔론 ― 이택광 떡밥

이택광의 글에서 인용 "정치를 떠난 예술은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예술행위는 정치적이다. 심지어 순수예술조차도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그너의 예술은 그의 반유태주의와 무관할 수가 없다. 마치 친일문학이 그러하듯.
문제는 바그너를 이스라엘에서 연주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음악에 스며 있는 그 정치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바그너에게 책임을 묻는 그 행위를 확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거론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한다. 말하자면 나치에게 책임을 묻는 행위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행하는 만행에 대한 책임을 묻는 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책임을 묻는다'는 윤리적 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당성이다."


2.
드뷔시의 <대낮에도 꿈을 꾼다>는 내가 처음으로 샀던 클래식 음반이다. 커버가 연한 하늘색에 재미있는 일러스트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당시 유행했던 브릿팝인 줄 알고 덥썩 집었다. 클래식 음반은 노란 딱지에 검정색 명조체로 작품명과 지휘자의 이름이 새겨진 딱딱한 디자인일 거라는 편견에 속았던 게다. 그때 드뷔시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잠이 많을 때였으니 아마 꿈이나 꿨겠지.

얼마전 경기필 연주로 드뷔시의 <바다>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함께 갔던 영진쌤이 어떠냐고 물으시길래 그림 같다고 답했는데, 실제로 이 작품이 우끼요에 파도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가 미술에서 아이코놀로지와 같이 해석되는 것이라면, 소리가 그림을 그려서 모티프가 일종의 영역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바그너와 드뷔시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원철님께 여쭤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드뷔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바그너의 음악은 여명으로 오해받은 황혼이다." 아따~ 패기 돋네, 너님이 짱 드셈.

 모던한-_-; 아티스트 드뷔시에 대해서는 원철님의 글 참고.
 http://wagnerianwk.blogspot.kr/2009/07/현대음악의-모더니티-아래-글에-이어.html

김원철 드뷔시가 발전론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를 빼고 나면, 바그너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옛날에 서양음악사였던가, 조교를 했었는데, 교수님이 저한테 '곡 제목 맞히기 듣기 평가' 문제를 내라고 하시더라고요.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중에서 중간에 나름 멋있는(?) 대목을 따다가 학생들한테 들려 줬더니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이라고 써낸 사람이 제법 많았죠. (사실은 그걸 노렸… ^^)


3.
지금 발키리가 날아 오르는데 아름다운 움직임과 속도감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김원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륀힐데의 섹시한 자태를 감상하시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bRj9f3PCe0M
제가 아는 어떤 분이 평하시기를, 조운 서덜랜드와 함께 오페라계의 양대 마징가(…)

4.
그림 같은 음악을 만들어낸 바그너와 드뷔시를 언급하면서, 또한 음악적인 그림을 그렸던 화가 클레의 회색 점과 카오스를 인용하는, 들뢰즈&가타리 커플을 생각하니 애증이 돋는다.

바그너식 모티프에 대해 들뢰즈&가타리가 쓴 내용 인용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다수의 모티프들과 연관성을 갖게 되면 각각의 모티프는 자신에게 고유한 판을 획득하며, 드라마의 줄거리, 충동이나 상황으로부터의 자율성도 커져간다. 또 인물이나 풍경으로부터도 점점 더 독립하게 되어 자체적으로 선율적 풍경이나 리듬적 인물이 되며, 모티프는 상호간의 내적관계를 끊임없이 풍요롭게 한다."
 반복되는 선율은 변화를 위한 것, 생명력을 드러내는 소리들, 리토르넬로.

5.
미술에 대한 비유는 대충 알겠다. 음악에 대한 비유도 공부해보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생물학은........ 생물학은........ ㅠㅠ

웍스킬과 로렌초라는 이름을 가진 생물학자들이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 <천 개의 고원> 11번째 고원인 리토르넬로에 대해 읽고 있다.

2013년 3월 28일 목요일

부족함과 관대함에 대해.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사랑하기는 쉽다. 고귀한 정신,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직업적 능력, 돋보이는 사교적 태도 같은 장점은 때로 사랑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단점 없이 완전무결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처음에 장점이라 생각했던 요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점으로 변하기도 한다. 고귀한 정신세계는 현실적인 무능력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외모는 결국 얼굴값을 지불하게 하는 파국으로 향하며, 직업에서 뛰어난 능력은 대개 일중독으로 증명되고, 사교적으로 활발한 태도는 만인을 향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을 입증하는 데 쓸모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알았던 어떤 사람을 회상할 때 그가 가진 장점을 떠올리다 보면 안도감이 든다. 그는 영리하고 재치있는 남자니까, 경제적으로 풍족했으니까,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니까, 굉장히 잘 생겼으니까, 돈독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아니더라도 잘 살고 있겠지, 괜찮다. 내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남자들에 대해서는 결핍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그 관계 속에서 즐거움만 맛본 뒤에 아주 사소한 이유로 헤어졌을테지만, 그런 이별의 과정도 기억하지 못한다. 완전한 사람은 완전히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핍까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꽤나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운동화끈을 꼭 묶지 못하는 둔한 손재주, 나보다도 한심한 기계치, 재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한 요리 솜씨, 만취하도록 마시는 술버릇, 지속적으로 탈모가 진행 중인 두피의 상황 같은 것. 전 남자친구의 단점을 열거하면서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그 큰 덩치로 쪼그려 앉아 운동화끈을 묶기 위해 바둥거리던 모습이라니, 애틋하다. 나는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고 이별 후의 상황을 잘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슬프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오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의 많은 부분을 사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가 나에게 충분히 관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수많은 결점을 지켜보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다독여준 사람, 그 덕분에 나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의 관대함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부모도 형제도 아니면서 그토록 아껴주는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는 부처님 같이 너그럽고 온화한 남자였다. 우리가 서로를 안아줄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의 결핍을 충분히 바라보고 다독이려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맙다. 고맙다.

2013년 3월 27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