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30일 월요일

총파업.




12.28. 총파업. 시청 광장. 십만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나도 그 중 하나. 선배언니와 만나서 녹색당에 합류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남동생과 남자친구까지 합류하여 넷이 함께 어슬렁거렸다. 이렇게 깃발이 많이 날리는 대규모 집회는 정말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구호를 외칠 때, 박근혜는 사퇴하라, 라고 하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든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사퇴 같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대신 물러나라 하면 될 것 같은데. 하야하라 같은 말도 그렇다. 좀 더 쉽고 편하게 쓰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은하철도 999 주제곡을 따라 부르며 점심밥을 지어 먹었다. 애인님과 통화를 하다가 파업철회 관련 소식을 들었다. 민주당에 화가 났다. 남자친구 말대로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 얹는 짓. 화내지 말고, 더 단단해져야겠다.


말하기.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보면 인성이 삐뚤어진다. 그냥 말하는 편이 낫겠다. 내가 책임질 일이라 봐야 기껏해여 연애의 불화나 욕을 좀 먹으면서 수명연장을 기약하는 수준이니까.

연말.

동생과 소주 한 잔 하다가 무심코 말했다. 내가 내일 모레면 서른 셋이야. 동생이 답했다. 내일 모레면 서른 셋이네. 관용어구가 현실이 되어 버리는 연말이다.

동생과 삼차로 커피숍에 왔다가 동생의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동창애들 중에 나도 보았던 적이 있는 녀석이 있었다. 아는 척을 하면서 한 마디 했다. "아 ㄷㅇ이 너 참 귀여웠는데!" 녀석 이제 아저씨가 되었구나 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을 해버렸네. 아유 ㅠ 나도 귀여웠어 얘.

한 해 동안 좋은 책을 읽었고 좋은 사람도 만났다. 감사할 일이다.





No quiero que llegue el 2014.

존칭.

돌아가신 분을 부를 때 보통은 존칭을 붙이기 마련이다. 열사, 의사, 이런 말은 피 흘린 동지에게 가장 높은 자리를 주기 위해 만든 존칭일 것이다.

밀양에서 송전탑에 반대하며 돌아가신 분들을 부를 때는 어르신이란 표현을 쓰더라. 나보다야 훨씬 어른이니 그렇게 부르는데 이 말은 너무 상대적이라... 그분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존칭은 보통 직업이나 직급에서 유래하기 마련이니 돌아가신 이치우 농부님, 유한숙 농부님, 이렇게 불러도 되지 않을까? 농부라는 말은 존칭이 될 수 없는 직업이라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내면에 있는 것 같다. 전통사회에서야 전임이든 겸임이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의 90% 이상이었으니 그랬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니까.

회상.

종종 세티를 보러 간다. 세티는 죽었다. 죽은 개다. 개를 묻은 곳에 가서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옆에 있는 무궁화 나무이다. 세티는 땅 속에 있고 다시 볼 수 없다. 안다. 세티는 그곳에 없다. 그 땅을 파보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 개의 시체가 있을 것이다.

세티는 고왔다. 누가 보아도 곱고 예쁜 개였다. 세티는 보드라운 갈색 털과 흰색 털이 어룩진 예쁜 시츄였다. 그애는 작지만 당당했고 호기심이 많았으나 신중했으며 경계심이 강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개였다. 단언컨대 세티는 지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강아지였다. 세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개였다.

세티가 살아 있을 때 그애가 노년이 되었을 때 동생과 수명을 두고 거래조건을 논했던 적이 있다. 세티가 십 년 더 살 수 있다면 내 명에서 십 년 빼... 주겠어. 내가 먼저 했던 이야기인지 동생이 했던 이야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조건에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수명을 조정하는 조건을 제시한 악마나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이 죽었듯 우리 세티는 죽었다. 그렇게 세티의 생이 끝났다.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집에 들어갔을 때 자박자박 걸어나오는 세티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슬프다. 그애와 같은 종인 시츄 강아지를 볼 때면 세티의 얼굴이 떠오른다. 보드라운 털을 가진 고양이를 만지면서, 우리 세티는, 이라고 시작하는 말을 하게 된다.
세티야. 세티야. 세티야. 세티야. 우리 세티야.

2013년 12월 27일 금요일

독서메모.


1.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을 즐겨 듣는다. 방송에서 황정은 작가님이 추천한 책, 북극허풍담을 후르르 읽었다. 짧은 이야기 모음집으로 극지대의 일상에 재미가 차고 넘친다. 인물과 상황과 사건이 모두 기괴한 느낌.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이토록 생생하게 읽히다니 신기한 일이다.

2.
수잔 손택의 일기 모음, 다시 태어나다,를 읽고 있다. 얼마 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가-평론가가 남긴 개인적인 메모를 훔쳐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손택도 이렇게 자기확신이 없고 우울하고 불안한 이십대를 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어쩐지 위안이 되기도 한다.

1957년 12월 31일의 일기.
일기를 쓰는 것.
일기를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생각들을 담는 용기-속을 터놓을 수 있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 문맹인 친구처럼-로만 이해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나는 그저 일기에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게 나 자신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한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아아,)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많은 경우- 그 대안을 제시한다.

3.
강신주의 감정수업.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분류한 인간의 욕망 48가지를 두고 각각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문학의 한 장면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좀 더 소소한 내용은 따로 한 페이지를 구성해서 현실적인 조언을 덧붙인다. 사족인가 싶은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 독자의 고민상담에 조언을 해주는 형식의 강의를 팟캐스트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상담을 요청한 일반독자보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례가 훨씬 더 보편적이면서 풍부하고 깊이 있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세계문학을 인용하고 곁다리로 이런 꼭지를 넣어준 듯, 이런 구성 괜찮다.
4.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 ㅡ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ㅡ 제국주의 식민지화의 뒤를 잇는 국가부채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읽고 싶었다. 돈으로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국제자본의 유통구조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 드문데 명쾌한 설명을 듣고 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고 명쾌한 기분만 남겨놓는 나의 뇌구조가 문제... -_-; 여튼 이전에 책을 샀던 기록은 있으나 책은 보이지 않도 누굴 빌려준 건가 잃어버렸나 헌책방에 팔았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다시 주문했다. 새 책을 펼쳐보니 들어가는 말의 소제목이 이러하다. 다시 연대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1장의 소제목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가슴이 먹먹하다.

 5.
초기 농경 단계의 원시부족 중 아프리카 또는 폴리네시아 어느 지역에서는 잉여생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이웃 부족을 초대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이거나 파괴하고 불태우는 등의 의식을 치른다고 하는 내용을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난다. 마빈 해리슨의 책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찾기가 어렵다. ㅠㅠ; 다른 인류학자의 책이었던가? 인류학 책은 거의 도서관에서 빌려 보아서 어디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엉엉.

김정훈 님의 제보: 포틀라치....축제고요..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에 나오는듯합니다.

포틀래치 potlatch

태평양 연안 인디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선물 교환 행위.

사회적인 지위를 승인하기 위한 행사로, 1849년 남부 콰키우틀 인디언들 사이에서 가장 성행했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집단마다 차이가 있지만 포틀래치에는 몇 가지 보편적인 특징이 있다. 즉 손님 초대와 연설할 때 선물을 받을 사람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지켜야 하는 의례적인 규칙이 있었다. 선물의 크기는 주는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영했다. 포틀래치에서는 큰 향연이 베풀어졌으며 축제를 연 사람의 친척들도 최고의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포틀래치에 초대된 많은 손님들이 증인이 되었으므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널리 공인받게 되었다.

재산이나 지위를 계승한 사람들이 새로 획득한 지위를 확정하기 위해 포틀래치를 행했으며 결혼, 탄생, 죽음, 비밀결사단체 가입 등 중요한 행사 때도 포틀래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포틀래치의 주목적은 행사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를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소한 일에도 빈번히 포틀래치가 개최되었다. 공적인 제재를 받은 적이 있는 개인들의 체면 유지의 방책으로도 이용되었으며,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놓고 다투는 사람들간의 경쟁수단이 되기도 했다.


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겨울의 메모.

겨울이 되면 지하철 탔을 때 엉덩이 닿는 부분이 따듯한 게 참 좋다.

겨울에는 버스 배차시간 벌어지는 상황이 참 괴롭다. 환승하려던 버스 배차시간이 12분 간격인데 주말이라 그런지 차가 꽤나 밀려서 20분이 지나서야 왔다. 추운데 덜덜 떨었더니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스쿠터나 자동차 운전할 때 버스에는 특히 양보를 해야겠다.

추운 계절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져도 좋은 분위기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정부에서 대놓고 민영화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자회사를 만들어 고수익 철도를 매각할지라도 '이것은 민영화가 아니다'라고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아웅 야동의 한 장면 같은 꼬라지가 맘에 들진 않지만, 적어도 민영화가 공공재를 사유화하려는 사악한 시도라는 사실에 많은 시민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변호인.


허지웅이 변호인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영화라는 결론에는 동의한다.

그는 한 편의 영화로 인해 다시금 촉발된 정치적 의견 대립이 피곤하고 끔찍한 일이라고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 진심을 담아 울먹이며 외치는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런 의문이 든다.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재미만은 아니지 않나? 그 이상의 가치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조롱받아야 할까? 이 영화가 사회적 맥락 바깥에서 재미로 소비되기를 기대하는 이유는 뭘까?

아래는 허지웅의 글 마지막 부분.

사실 <변호인>을 감상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단점은 영화 외부로부터 발견된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일베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인>의 단점은 세상에 여전히 비뚤어진 정의감만으로 모든 걸 재단하며 민폐를 끼치는 열성 노무현 팬덤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공모자이자 공생관계인 저들은 <변호인>과 관련해서 역시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만을 양산하며 논쟁의 가치가 없는 논쟁의 장을 세워 진영의 외벽을 쌓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는 건 피곤한 노릇이다. 그 난잡한 판에 억지로 소환되는 건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재미있는 영화가 재미를 찾는 관객들과 불필요한 소음없이 만나고 헤어지길 기대한다. 허지웅 (주간경향)

떠나간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



2103.12.20. 시청광장 밀양 송전탑에 저항하며 세상을 떠난 유한숙 할아버지의 영정, 밀양에서 올라온 할머니들이 분향을 하셨다.

우리의 총파업.




 
(사진은 고동민 선생님 페이스북에서 가져옴)

 
 
12월 22일 일요일 오후, 정동에 갔다. 한참을 대치하던 중 경찰이 쏜 최루액을 얼굴에 맞았다. 정면으로 최루액을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척 괴로웠다. 눈이 매워서 눈을 뜰 수가 없었고 콧물과 침이 줄줄 흘렀다. 다급하게 물로 캡사이신 성분을 씻어 내느라 옷이 젖어버렸다. 추운 날씨에 젖은 옷을 입은 채 버티려니 힘이 들었다.
 
시위현장에서 경찰과 대치할 때면 나는 언제나 공포를 느꼈다. 군복무를 대신해 이런 일을 해야만 하는 이들이 가엽고 안타깝다가도 그들의 눈빛에서 적개심이 보이는 순간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검은 갑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는 젊은 남자들은 보통 나보다 키가 크고 건장하다. 그들은 조직적인 훈련을 받았을 테고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지도 않을 것 같다. 이들을 대면하고 있으면 내가 한 없이 작고 약하게 느껴져서 괴롭다.
 
밀고 밀리는 몸싸움이 격해질 때는 그나마 감정적인 소모가 덜하다. 허나 요즘에는 체력적으로 버겁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여자라고 하더라도 젊은 나이니까 내 아버지 뻘 되는 아저씨들 보다야 낫겠지 싶어 앞에 나서는데 이런 저질체력으론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공포와 불안감을 가지고 앞에 서는 것이 전략적으로 보면 우리의 투쟁을 방해하는 일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한다.
 
정동대첩, 캡사이신 공격 이후로 겁이 나서 후방으로 빠져나왔다.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다고 편해지지는 않았다. 춥고 배가 고팠다. 어렸을 때 부당한 체벌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같이 분노와 저항감이 커지는 만큼 공포심과 무기력감도 커졌다. 결국 경찰이 해산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경찰대원들이 실수로 서로에게 캡사이신을 쏘고 말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다.
 
 
 
나도 저런 모습이었겠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본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타자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구나. 비극의 희극화.
 
 
***
 
 
 
다음 날, 딴지일보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1. 정동대첩 당시 경찰이 정말 원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1) 맥심

2) 맥심



글을 읽으며 한참을 웃었다. 경찰이 체포영장만을 가지고 수배자가 있지도 않은 건물을 깨부수고 들어가 저항하던 노동자들을 연행해간 뒤 아무 성과 없이 돌아서는 와중에 사무실 비품을 도둑질하려 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우리에게 비극적인 일을 희극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어떤 저항도 계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당신의 파업
 
정끝별
 
21세기는 파업의 시대가 아니라고
세계를 바꾸던 파업의 시대는 갔다고 나는 말했다
파업 백 일을 맞아 서울역 광장에서 거리 축제를 열던 저녁
택시는 좀체 무악재를 넘지 못했다 금요일이었고 퇴근 시간이었고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늦저녁부터 비가 그칠 것이라고 기상 캐스터가 말했다
황사도 좀 씻겨 내리겠다고 택시 운전사가 말했다
너무 막힌다고 나는 말했다
지금은 실업천만이니
아카시아나 파업을 하는 시대라고
아카시아가 꿀을 만들지 않으면 꿀벌이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지면 농산물 대란이 일어날 것이니 파업을 하려면 아카시아쯤은 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는 꿀벌이 파업을 했는데
꿀벌 유충이 곰팡이를 뒤집어쓴 채 줄줄이 죽어나가 꿀벌이 멸종될지 모르고 아카시아 파업도 꿀벌 파업과 연대되어 있을 것이니 파업은 꿀벌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말했다.
폐쇄된 직장 앞에서 오지 않는 기자들을 향해 기자회견을 할 때 당신의 명분이 너무 옳은 것이어서
사장집 앞에서 샌드위치맨이 되어 1인 시위를 할 때 당신의 요구 조건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낡은 메가폰을 들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다짐할 때 당신의 외침이 너무 오래된 것어이서
당신의 파업은 위험천만이라고 나는 말했다
가다 서다 무악재를 넘어 서울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빗 속의 로커가 목이 마르도록 사막의 갈증을 외칠 때
덜 젖으려는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갈 때
축제의 무대가 우산에 가리고 마이크까지 젖어버렸을 때
당신의 파업은 파업 중인 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밤, 거리 행진을 뒤따르다
손에 든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비를 가리다
기어코 헛발을 내딛고 말았던
삔 발목을 주무르다 택시에 우산을 두고 내렸던
세기의 상현달이 반괄호처럼 먹구름에 꽂혀 있던
당신의 파업이 늦은 밤이었다

  
***


친구가 정끝별의 시 <당신의 파업>을 사진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다. 2007년에 발표한 작품인데 지금 보아도 우리의 상황은 여전하다. 암울한 기분으로 친구에게 이 '여전함'에 대해 토로하자 친구는 '더함'을 말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구나. 시간이 지나니 더한 거겠지.

우리는 어떤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지 규명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경찰의 폭력과 정부의 폭주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아프고 화가 난다. 그러니까 웃으며 파업을 해야겠다.

고용주가 없는 프리랜서로서 파업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몇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토요일에 쉬기 위해서는 주중에 바쁘게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결심, 금요일 저녁에 원고의 수정요청이 들어온다면 무시하겠다는 다심, 추운 겨울날 길거리를 헤매다 보면 기관지염이 악화되리라는 자명한 사실.

나에게는 왕좌를 깨부술 능력이 없고, 외국에서 우리나라의 재산을 팔아주겠노라 약속한 대통령을 저지할 힘이 없고, 어머니의 가면을 쓰고 조잘대는 교활한 코레일사장의 낯짝에 접근할 방법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내 몸을 움직여 거리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어떤 상황이든 그 날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면 나에게 변화를 요구할 자격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도 하지 않는다면 너무 부끄러운 일.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모두의 행복은 연대와 우애와 연민과 웃음에서 출발한다. 나 하나는 작고 무력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이제는 보여줄 때가 됐다. 12월 28일, 노동을 멈추고 거리로 나와 함께 하기를 요청드린다.


2013년 12월 21일 토요일

녹색당에 대한, 지난 총선 때의 소개글.



2012. 4. 9. 월요일

이동현









총선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 선거의 막바지로 갈수록 여야의 공방은 치열해지고 조중동문 찌라시의 핑크빛 선전도 낯 뜨겁게 계속되고 있다. 이 혼탁한 시류에 맞서 국내유일의 민족정론지 딴지일보는 도도하게 자리를 지키며 깨어있는 시민들의 역사적 선택, 4.11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앞서 필독 님의 ‘정당비례투표를 도와주마!’ 기사를 접한 독자 여러분 사이에서 녹색당과 청년당에 대한 소개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화답하여 녹색당을 소개하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언제까지 핵발전소 돌릴 텐가?




옆 나라에서 핵발전소가 무너졌다. 옛날 옛적 얘기도 아니고 바로 일 년 전 일이다. 그동안 27만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열도 전체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원전사고 이후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기형아의 출산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이 임신과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당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수산물이 없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찾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 방사능측정기를 들고 다니며 알아보고 있는데, 그 결과를 인터넷에 올리거나 하여 남들에게 알리면 불법이 된단다.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는다고 방사능 물질이 사라질 리 없는데 정부의 대책이 이렇다. 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고였다. 사람이 성실하게 대비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일본 사람들이 미처 막지 못한 사고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막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느 마피아의 호연지기? 우리나라 핵발전소는 5~6.5리히터 규모의 지진에 버티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10년 주기로 규모 5.0 이상의 지진이 발생했으며, 5년 안에 6.0 이상의 지진이 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참고로 후쿠시마 원전의 내진설계 기준은 7.9였으나, 예상하지 못했던 강도 9의 지진에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한반도엔 대지진이 살금살금 피해가거나, 지진이 일어나도 모든 핵발전소가 지각판에 임플란트 박고 팔십 세까지 튼튼하게 서있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핵발전소에서 뿌리가 돋아나길 기대하는 대신, 그냥 이걸 안 해버리는 방법도 있다. 졸라 위험한 걸 안전하다고 우기지 말고 이제 그만하자. 낡은 핵발전소는 핵폭탄이다. 이것이 녹색당의 강령 1조다.














한반도의 지진 발생지역과 원자력발전소 위치




오른쪽 지도는 기상청 발표, 국내지진발생 추이(1978~2011년)




왼쪽 지도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 한국의 원자력발전소 위치(2011년)









핵발전소의 폐기는 지역 주민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지난 4월 4일, 부산 기장군 장안읍발전위원회는 고리원자력발전소의 폐쇄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통해, “납품 비리에 이은 고리1호기 비상전력 공급중단 사고와 사고은폐는 고리원전에서도 일본 후쿠시마 원전과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선언하며 ‘고리원전 즉각 폐쇄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3월 22일, 부산시의회는 고리 1호기의 폐쇄를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결의하고 결의문을 관계부처에 발송했다. 가동 이후 2011년까지 총 108건의 불시정전 사고가 있었던 핵발전소, 안전하지 않다면 폐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시민들의 요구사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경위를 조사한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노후한 고리 1호기의 재가동을 승인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참고로 새누리당 비례대표 1번 민병주 후보는 지난 2007년, 설계대로라면 30년이 지나 폐쇄돼야 했던 고리원전 1호기의 수명연장에 관여하신 위인이란 사실을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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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은 노후 핵발전소 폐쇄법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2030년까지 핵발전소를 모두 폐기하고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이 계획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능하다. 실제로 독일의 녹색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으로 2022년까지 자국 내 모든 핵발전소를 폐기하도록 원자력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역시 원전폐기 및 재검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소수정당인 녹색당과 정책적 연대의 가능성이 보이는 지점이다.














방사능 위협 유일한 대안, 녹색당




녹색당의 첫 번째 비례대표, 탈핵후보 이유진의 이야기









녹색당은 한 발 더 나아가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산 식료품을 추적하고 시민들에게 알리며 정부에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일을 계속해왔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일본산 수산물 중 세슘이 검출된 물량은 무려 1,768톤에 달한다. 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못해 냉랭한 정도. 냉장명태부터 냉동고등어까지 방사능에 오염된 각종 수산물이 국내로 수입되는 와중에, 일본산 생선을 국산으로 귀화시켜 판매했던 악덕 유통업자들의 활약상도 드러났다.




녹색당은 우리의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해 발로 뛰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에 수 차례 일본산 수산물의 수입금지, 일본산 수입식품에 대한 방사능 검사 강화, 식품방사능에 대한 엄격한 관리대책을 촉구해왔다. 녹색당은 모든 국민이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는 식량정의를 추구하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4월 6일, 녹색당 광화문 선거캠프에서의 기자회견 (관련자료)








4대강 삽질을 막을 이는 누구인가?




가카치세 토건성대, 대운하로 시작해 4대강으로 이름을 바꾼 대규모 난개발 삽질로 전국의 강줄기가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는 농민들의 땅, 팔당 두물머리를 기억하자. 팔당의 농민들은 가카에게 당한 걸로 치면 우리 국민들 중 누구보다도 고농도의 고초를 겪은 분들이다.




팔당호 일대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뒤 이곳 농민들은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팔당 지역은 유기농특구로 지정됐던 수도권 최대의 친환경 농업단지로 2011년에는 세계유기농대회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2007년, 대선후보 시절의 가카께서는 친히 팔당을 찾아와 유기농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 약속했다.




그러나 가카의 약속은 역시나 거짓말, 이 친환경 농업지역에 4대강 정비 토건족이 들이닥쳤다. 친환경 농업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기상천외한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세계유기농대회 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했던 경기도지사 김문수가 유기농이 발암물질을 생성한다는 참신한 주장을 발표해 세계농업계를 혼란에 빠트리는 한편, 국토관리청은 농지에 침입해 불법적인 토지측량을 감행했다.













팔당 두물머리에서 불복종텃발을 선언한 농민후보 유영훈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의 역사가 시작된 유기농업의 중심지, 팔당의 농민들은 대를 이어 일궈온 삶의 터전에 토건족의 삽날이 쑤시고 들어오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이들은 반민주적인 4대강 사업을 저지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싸웠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팔당부터 서울까지 꼬박 2박 3일을 삼보일배 하고, 자기 몸을 바쳐 단식으로 투쟁했다.




오랜 시간 저항해 온 팔당의 농민 유영훈은 녹색당의 두 번째 비례대표 후보가 되어 이번 총선에 출마했다. 유영훈 후보는 자영농 중심의 농업진흥과 한미 FTA 폐기, 식량자주권 확보를 중심으로 지속가능한 농업정책을 주장한다. 누군가에게 4대강은 철지난 이슈일지 모르지만 녹색당은 포기하지 않는다. 4대강 심판과 탈토건을 약속하는 녹색당 농민후보 유영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3월 21일, 4대강범대위와 녹색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통합진보당의 정책협약식








생명의 권리는 중요한 가치인가?




녹색당의 공식행사는 국민의례 대신 생명의례로 시작한다. 생명의례의 절차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는 소중한 생명인 주변 사람들과 인사하며 시작하고, 개발로 인해 스러져간 생명을 위해 묵념하며 끝난다. 녹색당은 국가주의를 넘어, 전 인류가 동의하는 보편적 가치인 생명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녹색당은 유일하게 생명권과 동물정책을 의제로 채택한 정당이다. 동물학대를 막고, 유기동물 대책을 세우고, 야생동물을 보호하며, 비윤리적인 공장형 축산을 금지하는 등 동물권을 확립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녹색당은 우리나라의 3대 동물보호단체(동물사랑실천협회, 동물자유연대, 카라)와 정책협약을 맺고 지지를 받고 있다.




녹색당 내 동물권 연구모임의 이름은 ‘개나 소나’, 이들은 말 못하는 동물들의 입장에서 생명의 권리를 고민한다. 개나, 소나, 사람이나, 동등한 생명의 권리를 법률로 보장할 수 있도록 명문화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일단 녹색당 안으로부터, 정당행사에 반려동물과 함께 참석할 수 있도록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수평적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인가?




녹색당의 정당조직은 수평적인 구조로 느슨하게 얽혀있다. 녹색당에는 전국 각 시․도당의 연합체인 ‘전국당’이 있지만 서울 ‘중앙당’은 없다.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사무처장‘이 있으나 ‘사무총장’은 없다. 시․도당에서는 ‘운영위원장’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대표’ 따위는 없다. 녹색당은 기존 정당의 수직적 정당조직 구조와 이를 드러내는 용어의 사용을 거부한다.




녹색당은 여성, 청년, 청소년, 비정규직, 소수자를 포함한 풀뿌리사람들의 힘으로 정치의 변화를 시도한다. 녹색당의 여성당원 비율은 53%, 당직자와 국회의원 후보자 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절반 이상인 유일한 정당이다. 전국 각 시․도당 및 창준위에 20대 대표(운영위원장)의 수는 청년당 다음으로 많다. 또한 녹색당은 정당 비정규노동정책 평가에서 한국비정규센터, 민변, 민교협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스마트한 정당이기도 하다. 녹색당의 모든 정책공약은 당원들의 직접적인 토론을 거쳐 만들어졌다.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당원의 직접추천을 거쳤고 직선으로 결정했다.




다양한 생명이 공존하는 숲과 같이 녹색당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출신성분도 다양하다. 환경운동가, 여성·청소년 인권활동가, 풀뿌리 주민활동가, 생협 조합원, 교육자, 성직자, 농부, 어부, 예술가, 의료인, 장애인, 채식인, 성소수자 등등. ‘나는 꼽사리다’의 두 띨띨이, 선대인 소장과 우석훈 선생 역시 녹색당의 친구들이다.














2012년 3월 4일, 녹색당 창당대회









마지막 선택은 녹색이다




핵발전소의 폐기, 4대강의 원상복구, 생명권 확립, 수평적 민주주의의 의제에 동의한다면, 그 영혼의 색상은 녹색임이 분명하다.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환멸을 안고 기표소에 고독하게 선 채 20개나 되는 정당의 명단을 앞에 두고 고뇌할 초록빛 영혼의 소유자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이번 4.11 총선에서 녹색당의 비례대표 정당 번호는 11번이라는 사실을 알려드린다.




녹색과 영혼의 싱크로율이 낮은 분들에게도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생태계의 파괴에 주의를 기울이시기를, 생명존엄성의 훼손으로 귀결되는 무분별한 성장을 약속하는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를, 그리고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분열의 조짐으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녹색당 창당대회 행사장에 전해진 진보신당의 축하 현수막









최근 창당한 녹색당과 청년당, (사회당과 합체하고) 늠름하게 버티고 있는 진보신당의 활동이 야권통합과 정권교체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생각이나 친박연합 등이 보수진영의 표를 분산시킬 가능성만으로 구국의 정당이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소수 진보정당의 활동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양당의 대결구도 속에서 승리를 위한 전략을 선택했다고 해서,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보낼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정당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권력을 분배하기 위한 실험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녹색당은 비례대표 5%의 득표로 세 명의 후보를 국회에 입성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탈핵후보 이유진, 농민후보 유영훈, 생명권후보 장정화는 녹색당의 가치를 현실로 펼쳐 보일 후보들이다. 또한 양양·영덕·봉화·울진의 박혜령 후보와, 해운대기장을의 구자상 후보가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다. 영덕 핵발전소 유치 백지화 투쟁에 앞장섰던 박혜령 후보와 낙동강에서 환경생명운동을 계속해온 구자상 후보의 선전도 기대하고 있다.




생태적 지혜, 사회정의, 참여민주주의, 비폭력, 지속가능한 발전, 다양성의 존중, 녹색당의 가치를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이번 총선은 즐거운 선택의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회는 소중한 한 표의 힘을 모아 우리 정당정치에 초록빛 새 봄을 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만약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녹색이다.”

- 페트라 켈리

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강박증.

별 쓸모 없는 물건을 모아두고 그것들에 집착해서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반대로 물건을 지나치게 정리하고 가차 없이 내버리는 상황도 있다. 양쪽 다 강박증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전문가의 진단이 증상을 개선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꾸준히 상담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듯이 물건을 늘어놓는 상황과 정리하는 상황이 번갈아 펼쳐진다.

최근 무기력증이 더해지면서 지금 내 방은 난장판 쓰레기통이다. 방바닥에 코 푼 휴지 따위를 일부러 흩뜨려 놓고 지내는데 그것을 치우면 불길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빨랫감을 치우지 않고 여기저기 던져 놓는다. 벽장문이나 서랍을 일부러 닫지 않고 그 안의 물건을 주기적으로 뒤섞어 버린다. 읽지 않는 책을 방바닥에 쌓아 놓고 괜히 발로 걷어... 차서 책상 밑으로 쑤셔 넣는다. 정리정돈하는 상태일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가끔은 나도 내 방문을 열고 놀란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어질러진 방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방에 불이 나거나 보일러 파이프가 터지거나 하는 극단적인 이유로 이 모든 물건을 몽땅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한다. 특히 책, 모두 물에 젖어서 복구할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상상이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고 사실 누군가 내 방에 침입해 그런 짓을 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내 아버지는 정리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종종 자식들의 물건을 내버리곤 했다. 엄마의 물건도 내버렸던가 둘 사이의 관계는 잘 모르겠다. 타인이 소유한 물건을 내버리는 행위는 분명 지배와 통제에 대한 갈망 또는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아버지의 공간인 서재에 들어가 보면 그 공간이 분명히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어느 정도는 수집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한 구석에는 자질구레한 물건을 무질서하게 모아두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쓰잘데기 없는 물건을 싹 쓸어 내버린다면 아버지는 나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다. 호기심이 들긴 하지만 나에게는 그를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 그런 상상이 일종의 복수심에서 나온 것 같기는 하다. 아버지가 동생의 물건을 내버렸던 밤에 나는 동생의 흔적을 지우는 듯한 태도에 분노했다.

깨끗하든 더럽든 강박적인 마음은 불안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내 공간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불면증과 이명증상이 다만 공간을 바꾸는 것만으로 훨씬 좋아지곤 했다. 여행지 숙소나 다른 사람의 방,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공공장소, 심지어 좌석버스의 한 구석에서 잠을 청할 때 훨씬 편안하다. 내 수입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월세를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덕분에 경제적인 여유가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미쳐버리겠구나 하는 공포가 들 때도 있다. 그보단 방을 어질러 놓는 편이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방을 어질렀다 치웠다 반복하는 과정이 미쳐가는 길인가 싶기도 하다.

금요일에 계약하기로 한 책이 있다. 돈이 좀 생기면 왼쪽 아래 어금니의 브릿지를 갈아끼울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상담과 치료를 받아볼 것인가 선택해야겠다. 치아도 정신도 부실하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 근데 치과의사가 브릿지 빼고 임플란트 하자고 그래서 치과 가기가 싫다. 암만 전문가라고 해도 남의 잇몸에 이물질을 박아넣는 수술을 너무 쉽게 권유하는 것 아닌가. 비용 문제를 뒤로 하고서 상상만으로 무섭다. 만약 어금니를 선택한다면 브릿지 잘 하는 차과를 수배해봐야겠다.

아 이놈의 불면증. 이런 쓸데 없는 일을 계속 쓰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렇다면 내일 당장 수면유도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줄 의사를 찾아가는 편이 나을까. 한동안 명상이 도움이 되었으나 요즘은 집중하기가 어렵다. 꿈 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다. 꿈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참 좋다. 현실에서 만나는 것보다 평온하다. 대개는 꿈 속에서 이 만남이 꿈이구나 깨닫곤 하는데 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굉장한 안도감이 든다. 현실이 아니니 상대에게 미안해 할 이유도 없어지고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그렇다. 꿈이라서 다행이야.

욕망의 주권.

욕망의 주권.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런 말을 만들었다. 요즘 너무 우울하고 자존감이 낮아져서 참 외로웠다. 날씨 탓인가 나이 탓인가 모르겠다. 아마 내 탓이겠지. 타자의 욕망에 종속되지 않고 외부의 욕망을 반영하지 않고 자아의 내면에 있는 욕망을 안정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오늘 점심 때 친구와 소주를 마시다 말고 주르르 울었다. 술에 조금 취했고 밤잠을 못자서 신경이 예민하긴 했지만 여튼 울컥해버린 이유는 일종의 배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친구가 내 욕망의 문제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우리 관계에서 꽤 자주 이런 일이 반복되었던 기억이 났다. 이번 기회에 터뜨려버리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그러면 꼰대년이라고 놀려줄 테다.

다른 사람이 나의 욕망...에 개입하거나 통제하려는 시도를 할 때 방치해 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타자가 나의 내면을 지배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있었던가, 그건 아니고. 두려웠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나를 바라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버려질까봐, 그러니까 부디 당신의 욕망대로 이용해 주세요.

얼마 전의 꿈이 떠올랐다. 손상된 도자기 아가씨. 얼굴이 구겨진 아가씨. 내가 그렇게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었네 깨달았다. 못된 놈이 도자기 아가씨의 얼굴을 파손하지 못하도록 어떤 대비책을 세워 두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내가 느끼는 고통과 슬픔을 억누르고 아무 말 없이 새로운 도자기 아가씨로 교환을 해 줄 게 아니라 화를 내고 싸웠어야 했다. 내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나는 그 못된 놈을 죽일 수도 있었다. (꿈에서라도 강해졌으면 좋겠다.)

욕망의 주권을 되찾아야겠다 하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다 보니 불면으로 인한 뇌내망상이라기엔 아무래도 너무나 타당한 말인 거라. 어딘가 출처가 있을 것 같아 불 켜고 일어나서 책을 뒤져보았더니 금방 찾았다. 라캉이 욕망이론에서 이미 다 정리해놓은 이야기. 설마 내가 완전 적확한 개념어를 찾아낸 걸까 싶어 잠시 두근두근했네. ㅋㅋ

좀 더 생각해보니 미묘한 차이가 감지되긴 한다. 욕망의 주체라고 하면 실체적 인간이 연상되는데 욕망의 주권이라 말하면 정치적인 느낌이라 나의 욕망이 타자와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 같다. 지금 내 마음이 좀 그렇다. 소모하지 말고 강해져야지. 분노가 끓어올라 화르르 불사르는 경험이야 많았지만 이렇게 무겁고 진득한 점도로 분노가 차곡차곡 차올라가는 느낌은 처음이다. 차가운 분노는 처음이에요. 감정의 온도가 낮아지니 견뎌내기 수월한 것 같다. 이런 변화는 날이 추워서 그런가 나이 먹어서 그런가;;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 18

2013. 12. 18. 수요일
이작가


18. 화장실

 
일행은 우르르 술집으로 몰려갔다. 지난 달 보안감사를 마치고 회식을 했을 때 보안과장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곳이었다. 장재완이 문을 열어젖히자 보안과장이 안으로 들어갔고 사장이 뒤를 따랐다. 다른 직원들도 줄을 지어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웨이터로 일하던 습관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장재완이 정중한 태도로 유리문을 붙잡고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맨 마지막에 남은 철수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재완과 눈이 마주치자 차마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철수는 서류가방을 다시 한번 바짝 몸으로 당겨 들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장재완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막 청소를 마친 듯 깨끗했다. 철수는 줄지어 늘어선 소변기를 지나쳐 대변기가 있는 칸막이로 향했다. 두 칸 중 한 칸은 청소 용구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는데 다른 한 칸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좁은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는 좌변기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꼭 끌어안고 있던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자 긴장이 풀렸다. 철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가방을 열었다. 수아의 채권 관련 서류가 담긴 파일은 철수가 서고에서 빼내 가방에 넣어 둔 그대로 담겨 있었다. 클리어파일을 펼쳐서 서류를 한 장 한 장 살펴보았다. 금전소비대차계약서, 신분증 사본, 주민등록초본, 수아가 근무했던 적이 없는 알 수 없는 회사의 재직증명서도 있었다. 철수는 서류들을 조심스럽게 파일에서 꺼냈다.

이 문서를 계속 들고 있다가는 언제 꼬리가 잡힐지 몰랐다. 술자리에서 누군가 가방을 열어 본다면,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려 내용물이 쏟아진다면, 만에 하나라도 가방을 분실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수아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회사 보유 채권을 외부로 빼돌린 사실을 들킨다면 그 결과는 철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철수는 양손으로 서류를 움켜쥐고 반으로 찢었다. 절반이 된 종이를 포개어 또 찢었다. 다시, 또 다시,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철수는 손톱만한 조각이 되기까지 종잇장을 열심히 찢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각을 그러모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토록 오래도록 수아를 괴롭혔던 채무가 한 줌의 종잇조각이 되어버렸다.

비어 있는 오른손으로 서류가방과 텅 빈 파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화장실 벽에 설치된 고리에 걸쳐 놓고 파일은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변기 뚜껑을 열고 찢어진 종이 뭉치를 쏟아 버렸다. 변기통에 고여 있던 물 위로 종잇조각이 둥둥 떠올랐다. 수아의 이름이 보였고 잘려나간 얼굴 사진이 보였다.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눈을 질끈 감고 수세식 변기의 밸브를 내렸다. 우르르 소리와 함께 종잇조각이 하수구로 사라졌다. 그러나 흔적이 단번에 사라지지 않고 작은 쪼가리 몇 개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철수는 수조의 물이 다시 차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흘려보냈다. 변기 안을 집요하게 살피며 여러 번 물을 내렸다. 모든 일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철수의 얼굴은 눈에서 흐른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재빨리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이 자리에서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여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도록 식탁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술집으로 들어가니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치훈 과장이 문간에서 두리번대는 철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서 어렵지 않게 일행을 찾았다. 식탁 위에는 이미 안주접시가 깔려 있었고 술잔이 몇 차례 돌아간 분위기였다. 비어 있는 의자는 콘돌리자 라이스 법무과장의 옆이었다. 철수가 의자에 앉자마자 박치훈 과장이 철수에게 소주잔을 내밀고 술을 따라 주었다. 철수는 고개를 살짝 돌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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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훈은 철수를 놀리듯이 말했다.

“김철수, 벌써 토하고 왔냐? 얼마나 토했길래 눈깔이 시뻘개.”

철수는 흠칫 놀라 손등으로 눈꺼풀을 비볐다. 화장실에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세수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볼을 쓸어내리자 물기가 느껴졌다. 누가 볼 새라 맨손으로 빠르게 얼굴을 닦아냈다. 박치훈은 철수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핀잔을 주었다.

“사내새끼가 돼 가지고, 냄새만 맡아도 취하냐?”

회사 안에서는 철수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울 것 없는 박치훈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박치훈은 제 앞에 놓인 빈 술잔을 들어 보였다. 철수가 엉덩이를 들고 팔을 뻗어 조금 떨어져 있는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박치훈은 철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오른편에 앉은 현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제 맛인데…”

현지는 박치훈 과장의 말을 못 들은 척 외면하고 맞은편에 앉은 철수와 법무과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지의 분홍빛 입술은 꼭 다물어져 있었으나 법무과장은 현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도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철수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낚아챘다.

박치훈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물고 한숨을 들이키더니 쯥쯥 소리를 냈다. 빈 술잔을 앞으로 내밀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나는 술이든 여자든 21년산이 좋던데.”
“뭔 소리여? 21년산 보다 30년산이 좋지.”


콘돌리자 라이스가 퉁을 놓으며 박치훈의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급하게 따른 술이 넘쳐 박치훈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박치훈은 투덜대면서도 능글맞게 말했다.

“우리 법무과장님 사랑이 넘치셔.”
“너무 넘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네.”


콘돌리자 라이스는 탁 소리가 나게 술병을 내려놓았다. 탁자에 유리병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조황진 과장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쪽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도 더 이상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조황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찬찬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철수를 향해 말했다.

“아, 철수는 매운 거 못 먹잖아. 계란찜 시켜줄까?”

식탁 위에 놓인 메뉴는 매운 쭈꾸미 삼겹살 볶음이었다. 철수는 조황진이 챙겨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주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작은 연체동물과 돼지의 목덜미에서 잘라낸 살코기 위로 기름기에 번들거리는 붉은 양념이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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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가 젓가락을 집어 들며 조황진에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쭈꾸미 좋아합니다.”

철수는 조황진과 눈을 마주치며 맵고 짠 안주를 먹어치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맛이 입 안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꿀꺽 삼켜버렸다.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열기가 전해졌다.

사실 철수는 매운맛을 전혀 즐기지 않았다. 즐기지 않을 뿐 아니라 견디지도 못했다. 붉은색 음식물을 입에 넣으면 그것이 내장을 아주 빠른 속도로 통과해 액상에 가까운 형태로 배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철수는 기꺼이 매운 양념으로 범벅된 쭈꾸미와 삼겹살을 연신 집어 먹었다.

원하는 것을 하나 얻었으면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고 철수는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 어떤 일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혓바닥과 입천장이 화끈 달아올랐다. 매운 입을 헹구려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먹고 마시다 보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술이 들어가자 모두들 목소리가 커졌다. 사장은 추심업계의 선배인 본사 보안과장을 향해 뻐기듯이 말했다.

“토토머니라고 재호 선배 들어간 회사 있잖습니까. 요즘 엄청 잘나가는 모양입니다. 거기도 추심원 많이 필요하다고 저보고 오라는 겁니다. 지지난 주에 얼굴 보자고 그래서 만났는데 거기 사장도 같이 나왔지 뭡니까. 아니, 토토 사장이 저한테 뭐라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냐, 기본으로 오백은 깔아 줄게 그러는 겁니다. 참 나, 어떻게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들어간답니까?”

사장이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지금보다 나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자신은 늑대이지만 경쟁사의 사장은 고작 개에 불과하다는 근사한 비유를 들었다. 철수는 사장의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영화 타짜에 나온 대사가 아니었던가? 철수는 잠시 영화에서 주인공 곤이가 고작 한 끝을 들고 오억을 배팅했던 아슬아슬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장의 말에 기분이 상한 본사 보안과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사장의 결혼생활과 2세 문제로 돌려버렸다.

“제수씨는 뭐 좋은 소식 없어?”
“저희 맞벌이라 바쁘잖습니까.”
“임마, 미룰 걸 미뤄야지. 오늘 당장 애를 만들어도 열 달 지나야 태어나. 애가 스무 살 되면, 니가 나이가 몇 개냐? 애 대학 가기도 전에 퇴직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 니가 정년까지 뻐팅길 거 같아? 암만 둘이 벌어 모아 놓는다 해도 애 낳아 봐라. 그야말로 밑 빠진 독이야. 어차피 낳을 거면 제수씨 설득해서 얼른얼른 해치워. 더 늙으면 애도 잘 안 생겨. 우리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보안과장은 사장보다 고작 두 살이 많았으나 어른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회사에서 승진할 길이 보이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을 길도 없는 중년의 남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랑거리는 마흔이 되어 얻은 딸자식 뿐이었다. 보안과장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아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장은 관심 없는 체 곁눈으로 흘끔거렸지만 표정에서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철수는 건너 테이블에 앉은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매각채권 목록에서 수아의 기록을 삭제할 방법을 구상했다. 단 한 사람의 데이터가 지워진다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여러 사람의 데이터를 무작위로 삭제한다면 어떨까?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장의 데스크탑으로 메인서버에 접속해 그 일을 처리해야겠다. 작업을 마치기 전에 누군가 사무실에 들이닥친대도 늘 그랬듯이 철수가 사무실의 모든 컴퓨터 전원을 켜 놓는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에 하나 나중에 데이터 삭제가 드러나 문제가 된다고 해도 사장의 컴퓨터가 진원지로 밝혀진다면 그 자신이 나서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할 것이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자 철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 같이 안도감이 들었다. 평소와 달리 연거푸 술잔을 비우다 보니 이성이 마비된 탓도 있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사장과 보안과장이 결혼생활의 희로애락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철수에게까지 들렸다. 보안과장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의 영특함을 입증하기 위한 사례로 모빌에 대한 집요한 관찰력과 탐구심을 거론했고, 딸의 귀여움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도리도리 잼잼의 율동성에 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했다. 딸에게 그토록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일찍 귀가하는 대신 술집에서 자신을 존중하지도 않는 후배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철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계속해서 술잔을 들었다. 위장이 울렁이는 느낌을 억누르며 목구멍으로 술을 밀어 넣었다.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위장이 아니라 대장이 문제였다. 철수의 몸속을 가득 채운 캡사이신과 알코올이 혼합되어 대장의 민감한 내벽을 자극한 지 오래였다. 꾸르르 꾸르르 분명한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철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쓰러졌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철수를 향했다. 철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 박치훈 과장이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오늘따라 존나 달리더니만.”

철수는 달렸다.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화장실 입구에 다다르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었다. 방금 전의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화장실의 좌변기는 하나 뿐, 수아의 이름과 얼굴이 인쇄된 종잇조각을 흘려보낸 변기에 엉덩이를 대고 배설을 할 수는 없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 좌변기를 이용하게 되겠지만 철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엘레베이터는 8층에 머물러 있었다. 철수는 비상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짝 힘을 주고 천천히 조심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보니 아래층과는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분위기도 딴판이었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벽은 색색의 대리석으로 요란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사자 모양 대리석 조각과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가죽소파가 보였다. 이곳이 말로만 들었던 룸살롱인가?

반짝거리는 은색 조끼를 차려입은 웨이터가 철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혼자 오셨습니까?”

철수는 다시 한 번 괄약근을 조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생 처음 와 본 유흥주점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철수가 머뭇거리고 있자 어디선가 중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박박 깎은 민둥머리에 자잘한 흉터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듯한 런닝셔츠 사이로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팍에 울긋불긋한 문신이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주먹’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먹은 정중하게 말했다. 철수의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설사가 급한 와중에도 공포가 엄습했다. 긴장감 때문에 금방이라도 실수를 해버릴 것만 같았다. 철수는 주먹을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화장실 좀…”

주먹은 피식 웃더니 다시 물었다.

“작은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큰 일이에요. 큰 일, 급해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주먹이 성큼 앞장을 섰다. 실내는 미로같이 복잡했다. 방 안에서 음악 소리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간이 문이 열리고 야한 옷을 입은 아가씨들과 쟁반을 든 웨이터들이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복도에서 주먹과 마주치면 목례를 하고 벽에 붙어 섰다. 철수는 이 낯선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자기 내부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를 폭발을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복도를 돌고 돌아 마침내 화장실에 도착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하얀 좌변기가 보였다. 철수는 후다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끌어 내리고 변기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힘이 풀리고 배설물이 변기를 때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촤르르. 그리고 철컥,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철수는 주먹에게 감사의 말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변기를 향해 달려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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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륵주륵 설사는 멈출 듯 하다 다시 흘러나오기를 반복했다. 철수는 양손으로 번갈아가며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이 화장실은 룸살롱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변기 옆에는 세면대와 샤워기 꼭지가 있었다. 샴푸며 비누 따위가 놓인 선반도 있었으며 구석에는 세탁기까지 있었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지독한 담배 냄새 사이로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타일바닥에는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빳빳한 검은 생머리, 곱슬곱슬한 노란 머리, 불그스레한 빛깔의 짧은 머리…….

바닥을 살피다 고개를 들어 보니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명단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아가씨 일요일 출근표’ 그 아래로 ‘날짜, 본인 조 이름 꼭 확인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표는 근무 날짜에 따라 네 개의 조로 나누어진 아가씨들의 명단이었다. 제니, 가영, 다빈, 유리, 이슬, 사랑, 나나, 세나, 태희, 유미… 백 명이 넘는 여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명단을 살펴보다 철수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C조의 수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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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러나 철수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본명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애칭으로 이런 이름을 선택하는 아가씨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설령 민수아가 유흥업소에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제 이름 대신에 수애나 정아, 또는 전혀 다른 민희 같은 가명을 쓸 것이다. 이 업소의 아가씨 명단 속에서 발견한 수아가 김철수가 알고 있는 민수아가 아닐 것이다. 철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철수의 몸은 그녀를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함께 보낸 시간 동안 느꼈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부드러운 젖가슴과 벌어진 입술과 축축하게 뒤엉키던 혀와 깊은 곳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열기…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신음 소리와 철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지저분한 화장실의 악취가 사라지고 따듯한 살내음이 아련하게 밀려왔다.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오른손이 어느새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철수의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장을 쏟아낼 기세로 설사를 분출해 낸 변기통에 정액을 받아 낸 두루마리 화장지 뭉치까지 집어넣고 나서 물을 내렸다.

수세식 좌변기는 모든 흔적을 깔끔하게 씻어 내렸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철수는 한참동안 변기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가랑이 사이로 변기통에 맑은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영혼을 어딘가에 보관할 수 있다면 이 변기 속에 집어넣어 흘려보내고 싶었다.

2013년 12월 18일 수요일

채권추심원 김철수의 하루 17

2013. 12. 11.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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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고리대금업을 보장하는 나라

사장은 선배인 보안과장에게 본사의 소식을 물었다.
 

 
“본사에서도 일이 많은가 봅니다.”
 
“요즘 장난 아냐. 사업이 점점 커질 모양이다. 처음 시작할 때 생각하면 지금도 어마어마한데 더 확장할 계획이라고 위에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신규지점 확장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런 수준이 아니라... 흠흠, 일단 확실한 건 채용을 더 할 거고 조만간 인사이동도 있을 테니까 준비 잘 하고 있어라.”
 
“무슨 일입니까?”
 
“아직 늬들한테 공지할 단계는 아니야. 여튼 실적 관리 잘 하고, 일어 공부도 좀 하고.”



사장은 보안과장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기는 했으나 그 정황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그는 선배에게 더 이상의 정보가 나오지 않으리라 판단하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본사 보안과장이 사장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 두 사람 옆에 서 있던 조황진 과장은 바짝 다가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인사이동이란 말이 나오자 맞은 편의 박치훈 과장과 다른 직원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러나 철수의 귀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기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 크게 울렸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이 격하게 울렸다. 목구멍 밖으로 내장이 빠져나올 것 같았다. 철수는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굳은 표정을 감추려 억지로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기괴하게 보일지 걱정할 여유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보안과장에게 쏠려 있었다.

보안과장이 탐색하는 눈초리로 철수의 책상 위를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서류더미 아래 깔려 있는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채권추심 A to Z> 보안과장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서류더미가 휘청 흔들렸다. 철수가 잽싸게 팔을 뻗어 종이 뭉치를 움켜쥐었다. 책상 위에 작은 지진을 일으킨 보안과장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무심하게 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말했다.

“채권추심 에이 투 제트, 채권추심의 모든 것을 한 권에 담았다. 이야... 이런 책도 보냐?”

 
철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결에 면접을 보고 입사가 결정되었던 날 인근의 대형 서점에 들러 사가지고 온 책이었다. 전혀 모르는 일을 시작하게 되어 불안한 마음에 샅샅이 읽어보고 그 뒤로도 사무실에 가져다 두고 종종 펼쳐보긴 했지만, 이 책은 개인 간의 채무를 받아내는 방법을 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회사 업무에 도움이 될 법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사장이 보안과장에게 슬쩍 몸을 기대며 책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씨익 웃으며 철수를 칭찬했다.
 
 
“이 녀석 보기에는 물렁하게 보여도 일을 아주 잘 합니다. 컴퓨터도 잘 다루고 대학 다니다 온 놈이라 일 처리도 빈틈없이 똑부러지게 합니다.”
 
 
본사 보안과장은 대학 물을 먹은 후배인 사장이 학력 운운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책장을 휘리릭 넘기면서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궁시렁거렸다.
 
 
“세상 일이 어디 책에 나온 대로 되냐?”
 
 
본사의 직급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자회사의 사장은 과장 급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사장은 본사에서 과장까지 승진하지 않고 독립해서 나왔기 때문에 과장이라 불리었던 적이 없었다. 본사에서 현재의 과장 직급을 이전에는 블럭장이라고 불렀다. 블럭장은 한 블럭을 책임지는 구역의 대장이라는 뜻에서 나온 직함이었다. 이름에서 연상되는 바로 그 이미지, 본사에서 오래 근무한 블럭장 중에는 건달에 가까운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 업계에서 십 년이 넘게 일했던 사장이라도 그런 선배들을 보면 기가 죽었다. 그보다 오래 이 업계에서 활약해 온 블럭장들이 했던 일은 지금의 추심원들의 일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다. 그들에는 현장이 중요했고 현장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실적을 올릴 수만 있다면 거의 모든 일이 허용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기를 경험했던 사장에게는 나름의 딜레마가 있었다. 당장 실적의 압박이 커질 때면 화가 나서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라고 부하직원들을 닥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진성 같은 녀석이 고작 욕설 몇 번 한 것으로 문제가 심각해져 금감원에 민원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이 사업은 살살 돈을 받아내며 길게 가야 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예전에 험하게 일했던 기억만 갖고 있는 선배가 채권추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을 늘어놓으면 사장으로서 입장이 곤란했다.

 
사장이 날을 세우며 보안과장의 말에 대꾸했다.
 
 
“채권추심도 옛날 같지가 않습니다. 법조항도 복잡해지고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금감원에서 얼마나 쪼는지 아슬아슬합니다. 아, 아까 전에는 형사도 왔다 갔는데 김철수 주임이 맡아서 잘 처리했습니다. 요즘은 상황에 맞춰서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사장은 괜스레 철수를 자랑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본사 보안과장은 그의 긴 말을 자르는 듯한 몸짓으로 철수의 책상 위에 책을 툭 소리 나게 내려 놓았다. 그리고 두꺼운 손바닥으로 철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인지 위협인지 칭찬인지 압박인지 모를 기묘한 말을 남겼다.

“앞으로 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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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보안과장은 철수의 서랍을 열어보려 하지 않았다. 책이나 읽고 앉아 있는 대학 물 먹은 녀석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보안과장과 사장, 조황진 과장이 다음 책상으로 옮겨간 뒤에도 철수의 팔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오진성에게 불똥이 떨어졌다. 보안과장의 날카로운 눈이 오진성의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빳빳한 메모지 조각으로 향했다. 그는 그 종이를 흩뜨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는 초본을 안 버리고 뭐 하는 거야?”
 
 
채무자의 초본을 열람해본 뒤에는 바로 파기하는 것이 개인 정보 보호 원칙이었다. 하지만 오진성은 종이를 모두 파기하지 않고 일부를 잘라서 메모 용지로 재활용하고 있었다. 오진성이 황급하게 설명했다.
 
 
“아, 저… 초본 용지가 종이 질이 빠닥빠닥하지 않습니까. 개인 정보 있는 부분은 다 잘라서 파쇄기 돌렸습니다. 이하여백 아래만 모아서 메모지로 씁니다.”
 
“얌마, 사장한테 메모지 좀 사달라 그래. 업계 1위 캐시앤머니 자회사 와이캐피탈에서 채권추심원으로 일하는 새끼가, 그지 새끼도 아니고 이게 뭐냐, 이게?”
 
“죄송합니다.”
 
“외부로 유출돼 봐라. 걸리면 파면이고 여차하면 실형이야.”
 
“주의하겠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사실 오진성이 크게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개인정보 내역을 외부로 유출한 것도 아니고 채무자의 주민등록초본을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아무 내용 없는 여백을 모아 메모지로 썼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안과장은 으름장을 놓았다. 빌미를 잡았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사장까지 한데 묶어 꾸짖었다.
 
“이제는 우리도 이런 거 세부적으로다가 전부 다 조심해야 한다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라고 했잖아. 언제까지 사채꾼 소리 듣고 싶냐? 얌마, 애들 좀 잘 챙겨.”
 
 
와이캐피탈의 모회사 캐시앤머니는 업계 1위의 대부회사로 일본계 자본이 투입되어 설립된 회사였다.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상륙한 지 13년이 되었고 그 동안의 순익을 합산해 보면 6천억 원이 넘었다. 한국의 대부업체 자산순위 1, 2위는 모두 일본 자본, 일본계의 대부업체 9개의 시장점유율은 60%가 넘는 실정이다.

일본계 대부업체가 국내 시장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었던 계기는 이자제한법 폐지였다. 1962년 이자제한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당시의 이자 한도는 연 2할이었다. 이자의 상한선이 실제 거래에 비해 낮게 책정되어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3년 뒤 법이 개정되면서 최고한도를 연 4할 이내로 정했다. 이후로 최고 이자는 내려가기도 했고 다시 올라가기도 했는데 1997년에는 연 25%에 달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IMF는 경제위기의 해결 방안으로 고금리정책을 권고했다. 지금은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당시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뒤 제한이율을 연 40%로 대폭 상향 조정했고, 다음 해 이자제한법 자체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자제한법의 폐지를 계기로 일본계 자본이 대규모로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자제한법의 빈 자리를 대부업법이 대신했다. 2002년 제정된 대부업법은 대부업자에 대해 최고금리를 연 66%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을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셈이다. 일본계 대부업체는 한국시장 구석구석을 파고 들었다. 국내 저축은행 등의 금융회사도 연 40~50%의 금리로 대출을 실시했다.

 
지역기반의 소규모 사채시장의 자리를 전국구 대형 대부업체가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악랄한 약탈적 대출이 횡횡했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대출을 받았다. 과중한 채무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고금리로 금융자산이 떼돈을 벌어들이는 와중에 이자소득세는 오히려 내려갔다.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율은 소득규모에 따라 15~40% 구간으로 나뉘어졌는데 이 구간이 통합되어 20%로 조정되면서 이자수입으로 거액의 소득을 올리던 자본가의 소득세액은 최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자제한법이 부활하기까지 일본계 대부업체는 한국시장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게다가 2007년 부활한 이자제한법은 이전과는 달리 등록된 대부업체와 인허가를 받은 금융업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권, 대부업계가 이자제한법 부활에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현행 이자제한법은 최고금리를 연 30%로 규정하고 있지만, 대부업계와 금융관에 대해서는 예외로 연 39%의 고금리를 인정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대부원금에 따라 연 15~20%를 최고이자율로 제한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연 20% 선이다. 미국의 경우 주에 따라 다른데 대부분의 주가 연 8~18% 수준이다. 캘리포니아주에서 면허가 있는 전당포업자가 225달러 이하의 소액을 대출할 경우에 한해 연 30%의 이율을 인정하는 정도가 최대 규모이다. 우리 나라의 법정최고이자율은 지나치게 높다. 제한이율이 높다는 것은 정부가 고리대금업을 보장하고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일본계 자본의 입장에서 한국의 대부업 시장은 손 닿을 거리에 있는 먹잇감이다. 낮은 금리로 본국에서 자금을 조달해 한국의 대출자에게 정부가 보장하는 고금리로 대출을 하고 있으니 이익을 내지 못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활약하는 일본계 대부업계의 수익률은 눈부시다. 영업이익률이 30%가 넘는 업체도 있다. 일본계 대부업체는 이제 국내의 저축은행을 인수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2013년 9월, 금융위원회는 대부업체가 저축은행을 인수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금융위원회가 제시한 조건 중 하나는 자기자본 500억~1천억 이상의 규모일 것, 이 조건에 해당하는 대형 대부업체는 10여 곳으로 대부분 일본계 대부업체입니다. 그동안 국민의 혈세,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 놓은 저축은행이 일본계 대부업체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본계 대부업체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자 다른 외국계 자본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습니다. 일본계 대부업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저축은행을 집어 삼키려고 번호표를 뽑아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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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보안과장은 한바탕 사무실을 헤집었다. 추심과에서는 오진성이 초본 용지를 메모지로 사용하는 사소한 일까지 적발했지만, 법무과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 과장과 화기애애하게 한담을 나누었다. 콘돌리자 과장은 보안과장에게 본사에서 근무하는 선배들 소식을 묻고 난 뒤 할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능수능란하게 그의 가족 안부를 물었다.

 
보안과장이 휴대전화를 꺼내 저장해둔 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직 어린 아기라 표정이 다양하지도 않았고 누워서 자거나 엎드려 있는 자세가 비슷비슷한 사진이었다. 그럼에도 콘돌리자 과장은 다양한 감탄사를 섞어 가며 사진 한 장 한 장에 반응했다. 그러다 더 이상 새로운 찬사를 찾아낼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르자 옆에 있던 고현지에게 액정화면을 보여주었다. 현지는 귀여워요, 깜찍해요, 예뻐요, 세 가지 표현을 번갈아 사용하며 사진에 반응했다. 콘돌리자 과장과 현지의 단결된 칭찬을 들으며 딸바보 보안과장은 헤벌쭉 웃었다.

보안감사를 하는 날은 늘 그랬듯 회식이 있었다. 아주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집단음주행사장에 참석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사장이 인정하는 특별한 사유는 부모님이 위독하다거나 본인이나 배우자의 출산이 임박했다는 정도의 내용이었는데, 이런 이유를 들어 회식에 불참한 직원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회식과 그 후의 여흥을 무척 좋아하는 사내들, 장재완과 박치훈이 보안과장을 양 옆으로 호위하며 앞장을 섰다. 사장과 다른 추심원들, 그리고 콘돌리자 과장을 중심으로 한 여직원들이 따라나섰다. 철수는 느린 걸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손에 들고 있는 가죽가방이 한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수아의 신분이 적혀 있는 각종 문서와 대출관련 서류가 들어 있었다. 이 가방을 들고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나 힘겨웠다.

강남대로로 들어서 인파를 가로지르게 되자 철수는 소매치기가 이 손가방을 낚아채어 가면 어떡하나 하는 불길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가방 안에는 값 나가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면 철수가 저지른 범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 것 같았다. 철수는 가방을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가 그런 식으로 귀중품인 양 손가방을 들고 있다가는 표적이 되고야 말 거라는 생각에 가방을 고쳐 들었다.

철수는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수아의 대출 관련 문서를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런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다. 일단 회사에서 채권이 사라지게 하는 것까지가 철수가 세운 계획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회사의 누군가가 수아에게 빚독촉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졌다.

이제 두 번째 문제가 생겼다. 관련 문서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언젠가 다시 수아를 만나 돌려주기 위해 보관하는 편이 좋을까? 그러나 철수는 수아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회사 소유의 채권을 파기해버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도 떳떳하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