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3일 수요일

내향성.

매일 밤 조금씩 프레모 레비의 책을 읽고 있다. 레비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이탈리아로 돌아온 인물이다. 그의 책에 묘사된 수용소 풍경에서 가장 끔찍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3층 침대로 빼곡한 수용소 침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곳은 유대인에게 유일하게 제공되는 휴식처, 그러나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해 최소한의 수면을 보장할 뿐 혼자 있을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수용소를 다루는 책에서는 폭력, 굶주림, 고통, 인격적 모욕, 배신과 밀고 등의 내용이 중요하게 묘사되지만, 그 상황을 곰곰이 상상해보다 결국 울게 되는 순간은 그곳에 혼자만의 시간이 없고 혼자 있을 공간이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였다.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몇 개의 심리검사 결과에서 외향-내향의 성향을 묻는 질문에 늘 내향에 속하는 답을 선택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이, 나는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일보다는 혼자 책을 읽는 일이 좋았다. 여럿이 하는 운동경기는 아무래도 잘 할 수가 없지만 혼자 하는 운동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경쟁자가 없을 경우의 수영이나 달리기 같은 것들. 학교에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안하고 군중 속에서는 괴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일례로 시장에 나가는 것보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 더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 매장에서 점원이 무언가 권유하면 거절하기 피곤해서 보이는 대로 물건을 사버리는 때가 많다. 휴대폰, 타블렛, 옷, 구두 등등 먹을거리 말고는 언제나 호갱. 나름 절제하고 있는 분야는 금융계통인데 은행카드사나 보험사 직원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고개를 흔든다. 반대로 종교계의 인물이 나타나 무언가를 권유하면 기세에 맞서 거절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래, 당신은 어떤 진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르지, 하다보면, 이름도 처음 듣는 신흥종교에 대해 질문하거나 돈을 내주는 일이 종종 있다.

회사에 다닐 때도 내향성은 비슷해서, 회의시간에 일의 경과를 보고하는 이상의 발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일을 진행하며 다른 부서 사람과 이견이 생기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기획안을 고쳐 써 전송하는 쪽을 택했다. 내 의견이 너무나 옳아서 다른 사람의 의견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의견을 주고받을 때 서면으로 처리하는 쪽이 더 편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던진 말을 모아서 하나의 글로 묶어내는 일이 제법 적성에 맞아서 글쓰는 일을 전업으로 했던 적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평하지만, 사실은 이후에 내 글을 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활동가라니! 내가 이런 직업에 종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선거후보라니!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해보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의미 있는 도전이었지만, 최고의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도 그렇고 정당에도 그렇다. 지난 지방선거 기간을 떠올려 보면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지지를 호소하는 시간 사이에 혼자 있는 시간을 두었다면 이보다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무척 지친다. 타인과 두세시간을 보내고 나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그런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선거운동 기간 중에 스쿠터를 타는 일이 참 신이 났었다. 왜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스쿠터는 혼자만의 탈것이기 때문인 듯싶다. 등 뒤에 누군가를 태우고 무사히 운전을 할 자신도 없지만 그렇게 하고 싶단 생각도 들지 않는다. 선거기간에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스쿠터를 타고 달릴 때뿐이라 그렇게 애착이 생겼던 건가... 신나서 스쿠터를 탈 때도 스피드를 즐기며 질주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은 그저 시들하다. 몸이 아파서 운전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원하는 때에는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 굳이 스쿠터를 운전할 이유가 없다. 비가 와서 주차장에 방치되고 있는 스쿠터가 짐스럽기도 하다.

엊저녁에 프레모 레비의 휴전,을 읽다가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를 주제로 내향성의 인간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작가 김영하도 역시 내향의 인간이라 꽤 열변을 토했다. 퇴근 전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재생이 되어서 생각난 김에 우두두두.

여튼, 잠들기 전에 레비의 책은 적절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요즘 꿈자리가 영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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