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는 자신이 "아도르노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추종자"라고 말년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말년의 양식'이란 용어 역시 아도르노의 저작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사이드는 토마스 만, R.슈트라우스, 장 주네, 람페두사, 카바디 등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이 예술가들의 '말년성'에 주목한다.
말년성은 한 예술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미적 노력의 완성이다. 이러한 미적 노력이 반드시 보기 좋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타협할 수 없는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이 말년이 되어서야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말년성은 필연적으로 예술가의 사망 이후에 발견되는 특성인데, 이 책에서 다루는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말년적 형식을 창조했다. (책에서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년성은 최후의 저항이며 망명의 형식이다. 예술가가 사망한 뒤에도 예술작품이 전해질 것이라는 미래를 전제했을 때, 예술가는 현재의 지배체제 또는 정상성을 넘어서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럽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물이 예술가 사후의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저항과 저항의 '재미'를 전해준다.
그(에드워드 사이드)가 음악의 "과묵함" "암시적 침묵"이라고 부른 것이야말로 음악의 가장 큰 즐거움이며, 정치적으로나 다른 면으로나 절망 가득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희망이다. 그것은 "불안정한 망명의 영토"이며, 거기서 우리는 "먼저 무엇이 파악될 수 없는지 진실로 파악한 다음, 그래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마이클 우드 /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장호연 옮김, 마티, 2008.)에 수록된 서문의 마지막 문단.
아도르노는 배제된 것에 대해 예술가가 마지막으로 관심을 보인 결과물을 '파국적 예술작품'이라 불렀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지만, 말년성은 분열의 원동력이 되어 영원히 예술을 시간 속에 남겨둔다. 그 불안정한 망명의 영토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예술은 다만 환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가야할 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년의 양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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