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일 금요일

얼굴성과 예술.

-되기 위해서 얼굴을 해체하기 위해서...
"여기에는 예술, 최고 예술의 모든 자원이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는 글의 모든 선, 회화성의 모든 선, 음악성의 모든 선 등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글을 통해서이고,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색에 의해서이고, 냉혹하고 기억이 없게 되는 동시에 동물이 되고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 즉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음악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목적(fin)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예술 안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닌 이 모든 실재적 생성들, 예술 안으로 도주하는 것, 예술 안으로 피신하는 것에 있지 않은 이 모든 능동적인 도주들, 예술 위에서 재영토화되지 않고 오히려 예술을 탈기표작용적인 것, 탈주체적인 것, 얼굴-없음의 영역 쪽으로 데려갈 이 긍정적인 탈영토화들인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인 것이다. (천개의 고원 pp. 356-357.)



얼굴은 백색인이 설정한 그리스도의 얼굴이에요. 권력의 배치물이 형성될 때 필요한 수단, 가장 표면적인 것, 타자와의 차이를 결정하는 기준이에요. 꼭 인종주의에만 해당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백인의 흰 얼굴이 다른 인종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이해하면 직관적일 것 같아요. 얼굴성은 기호계의 외부를 배제하고 이질적인 표현들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라 유목적인 기계나 원시적인 다양성이 출현하는 것을 억압하는 것이고요.


인용한 구절은 얼굴을 해체하고 리좀적 특질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술자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나 예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리는 유미주의적 관점, 예술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이런 느낌은 아닌 듯, 들뢰즈의 다른 저작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프란시스베이컨의 회화에서 얼굴성이 해체되는 것과 같이, 재현적이고 현실반영적인 예술이아니라 난폭한 감각 같은 것이요. 결국 책 꺼내서 인용하자면 얼굴성에서 해방된 특질들이 풍경성, 회화성, 음악성에서 해방된 특질들과 함께 리좀을 만든다고 해요. 얼굴성이 정치인 것과 같은 이유로 얼굴의 해체도 정치의 문제고요.

욕망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억제하는 자본주의의 정신분열증. 모든 사물을 얼굴로 보는 것이 결국 페티시즘, 얼굴은 추상긱계, 인식이 부여하는 고정관념이 생산되는 방식. 의미를 생성, 주체회의 문제가 되는 이유, 이런 안면성이 기표적 안면성이라면, 도표적 안면성은 주변을 변화시키고 획일적인 배치를 변화시키는 행위. 안면성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 도표적 요소를 추가해서 책임주체를 해체하자는 것. 자본주의는 모든 개인에게 기표적 얼굴성-주체성을 강요하지만, 얼굴 없는 개인들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리좀적 특질에 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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