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화요일
삼 주 동안의 메모.
1. 감기
기침이 너무 심해 이비인후과에 갔다. 의사에게 주사를 안 맞겠다고 했더니 이것 저것 약을 많이 처방해 주더라. 먹는 약에 항생제 따로하고 시럽까지, 거기에 천식에 쓰는 스프레이 흡입기에 잘 때 기관지확장 패치도 붙이고 자라고 했다. 약봉지를 한 뭉치 들고 왔다. 꺼내 놓고 보니 참 많네.
2. 내복
겨울 내복을 두 벌 갖고 있다. 하나는 십년 정도 입어서 닳았고; 다른 하나는 원체 얇은 감이다. 안 입는 것보단 낫겠지만 별로 따듯할 것 같지 않아서 밀어 놓고, 아 히트텍 사야겠다, 그랬더니 동생이 제 카드를 주었다. 누나 히트텍 사라. 두 벌 사서 빨아 입어라. 그런다. 우엥우엥 고마와라. 히트텍 사러 가야쥐.
3. 페이스북
퇴근시간에 차가 많이 막혀서 신나게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이랑 기사링크 읽다가 버스정류장을 놓쳤다; 운전하길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남이 운전해주는 차에서 딴일하는 게 좋은 게지. 조금 걷게 되었지만 버스기사님 땡큐!
4. 아는 사람
학교다닐 때 일. 학교 근처에 밥 먹으러 나갔다가 어디서 많이 뵌 듯한 아저씨를 만났다. 일단 꾸벅 인사를 하고 나서 반가운 척 했는데 돌아서고 나서도 누구시더라 기억이 안 나는 것이었다. 나중에 복사집에 가서야 깨달았다. 복사집 아저씨, 이름도 몰랐지만, 복사물을 맡겨놓고 일하시는 동안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얼굴이 눈에 익었던 모양이다. 새삼 반갑더라는.
5. 좋은 일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나 고민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닥쳐오는 일 중에 하기 싫은 일을 골라내고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고 싶은 것부터 시작하다 보면 결국 바라는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애인님이 간단한 원칙을 세워주었다. 좋은 일만 하자. 나한테 좋은 일, 그리고 남에게도 좋은 일. 참 쉽구나.
6. 물고기가 되고 싶은 여자
Repeat after me, I'm a fish.
Repeat after me, I'm a fish.
Repeat after me, I'm a fish.
이 말을 반복하는 여자를 보았다. 그네는 물고기가 되고 싶은 걸까? 하루 종일 수영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물고기가 아니라서 그 말을 따라하지는 않았다.
7. 절망
이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그릇된 희망이었구나.
전교조 선생님들 내부에서조차 그렇게 많은 수가 해직교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쪽으로 투표할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네편에서는 가지를 쳐버리면 세력이 약해지리라 기대했겠지만 정 반대의 결과가 나왔던 것. 그래서 이번에는 사 천 명이 넘는 거대한 몸통을 단번에 잘라낸 것인가.
8. 어려움
월급생활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 가장 힘든 수요일.
9. 패션
나는 중국에서 이 년 동안 살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는지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패션 트렌드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더랬다. 지금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젊은 중국인 남녀가 한국인의 패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들은 더 예쁘게 입고 싶은 젊은이구나 감안하고 듣더라도 새롭다.
10. 코끼리 똥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있습니다. 사흘에 한 번은 코끼리 만큼 똥을 누고 일주일에 한 번은 아름다운 꿈을 꾸고 거의 매일 끼니 거르지 않고 밥을 먹습니다. 건강해요. 코끼리가 싸는 만큼 내장을 가볍게 하고 휙 나아갈 정도라니까요.
11. 정치적인 일
얼마나 헌신하는지와 얼마나 애정하는지와 얼마나 지지하는지는 다른 일이겠지.
할수있는만큼만.
12. 감사
그래도 지구님 잘 돌아가네. 고마와.
13. 말하기
꿈은 나의 꿈. 그러나 나만의 꿈은 아니겠지.
오랜만에 집에 들어왔더니 동생이 내 방에서 자고 있다. 자기 전에 팟캐스트 방송을 틀어 놓은 모양, 내 목소리가 들린다. 애잔하다. 나는 샤워를 하고 동생 방에 와서 자려고 누웠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동생과 같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물론 동생이 무슨 죄냐고 하면 할 말 없다.
14. 결코, 지나가지 않으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대의 경구. 대단한 통찰에서 나온 말이겠지만 한국에서의 용례는 나는 네 일에 관심이 없다거나 함께 해결책을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의중을 에둘러 전할 때 또는 자기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하고 싶으니 입 다물라는 권유를 할 때 두루 널리 쓰인다.
어떤 일도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 그 일이 지나가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을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의 감내를 당연한 일인 양 포장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놈들은 보통 가해자이거나 동조자에 해당한다. 사건과 아무 상관 없는 입장이라면 이런 무책임한 장담을 하는 대신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얘기해주면 좋겠다.
15. 안녕들 하십니까?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이렇게 시작되어 널리 퍼져 나간다. 감동적이라 눈물이 난다.
16. 꿈 이야기
손상되기 쉬운 예쁜 아가씨들 도자기로 만든 예쁜 아가씨들 빌려드려요. 어떻게 사용하든지 묻지 않아요. 곱게 쓰고 돌려주면 잘 씻어 두었다가 다른 이에게 빌려주지요. 그 예쁜 도자기 아가씨 중 하나가 구겨져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돌아왔다.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새 제품을 꺼내 바꿔 주었다. 구겨진 도자기 아가씨를 보니 슬펐다. 내 얼굴도 구겨졌다.
17. 과로
할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이런 노랫말이 자꾸 떠오른다. 자우림 나빠요. 대충 급한 것만 쳐내고 술이라도 마실 테다. 엉엉.
18. 독서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아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을 읽었다. 마음이 현실을 떠나고 싶을 때 SF소설을 읽으면 결국 돌아오게 되는 효과가 있나보다.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을 마저 읽고 나면 분명 한 주를 살아낼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결국 밤잠 포기하고 책을 읽었다. 독서는 가장 쉬운 현실도피의 수단.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도가 되었다. 이제 힘내서 잠을 자야지.
19. 일
새 작품 기획안을 빨리 달라는 독촉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금요일까지 원고를 하나 써달라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당장 급한 일로는 내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연재물이 기다리고 있다. 엄청 바쁘다고 징징거리려 그랬는데 쓰다보니 별 일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잇힝 ㅇㅅㅇ
낮동안 엄청 심란해서 집중하지 못했다. 자료 수집 충분히 하지 못한 채로 그냥 기획서를 쓰기 시작했는데... 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이 들지만 지도도 나침반도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20. 새삼
이제와 다시 생각해보니 백기완 선생님이 졸라 옳으셨네.
밤은 어둡구나.
자본론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21. 감기
기침감기는 삼 주가 넘도록 떨어지지 않는데, 생강차는 다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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