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9일 목요일

강박증.

별 쓸모 없는 물건을 모아두고 그것들에 집착해서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반대로 물건을 지나치게 정리하고 가차 없이 내버리는 상황도 있다. 양쪽 다 강박증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전문가의 진단이 증상을 개선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꾸준히 상담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듯이 물건을 늘어놓는 상황과 정리하는 상황이 번갈아 펼쳐진다.

최근 무기력증이 더해지면서 지금 내 방은 난장판 쓰레기통이다. 방바닥에 코 푼 휴지 따위를 일부러 흩뜨려 놓고 지내는데 그것을 치우면 불길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빨랫감을 치우지 않고 여기저기 던져 놓는다. 벽장문이나 서랍을 일부러 닫지 않고 그 안의 물건을 주기적으로 뒤섞어 버린다. 읽지 않는 책을 방바닥에 쌓아 놓고 괜히 발로 걷어... 차서 책상 밑으로 쑤셔 넣는다. 정리정돈하는 상태일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면 무척 놀랄 것이다. 가끔은 나도 내 방문을 열고 놀란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어질러진 방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방에 불이 나거나 보일러 파이프가 터지거나 하는 극단적인 이유로 이 모든 물건을 몽땅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한다. 특히 책, 모두 물에 젖어서 복구할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상상이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고 사실 누군가 내 방에 침입해 그런 짓을 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내 아버지는 정리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종종 자식들의 물건을 내버리곤 했다. 엄마의 물건도 내버렸던가 둘 사이의 관계는 잘 모르겠다. 타인이 소유한 물건을 내버리는 행위는 분명 지배와 통제에 대한 갈망 또는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아버지의 공간인 서재에 들어가 보면 그 공간이 분명히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어느 정도는 수집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한 구석에는 자질구레한 물건을 무질서하게 모아두고 있다. 만약 내가 그 쓰잘데기 없는 물건을 싹 쓸어 내버린다면 아버지는 나에게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다. 호기심이 들긴 하지만 나에게는 그를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 그런 상상이 일종의 복수심에서 나온 것 같기는 하다. 아버지가 동생의 물건을 내버렸던 밤에 나는 동생의 흔적을 지우는 듯한 태도에 분노했다.

깨끗하든 더럽든 강박적인 마음은 불안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내 공간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불면증과 이명증상이 다만 공간을 바꾸는 것만으로 훨씬 좋아지곤 했다. 여행지 숙소나 다른 사람의 방, 도서관이나 카페 같은 공공장소, 심지어 좌석버스의 한 구석에서 잠을 청할 때 훨씬 편안하다. 내 수입으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월세를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덕분에 경제적인 여유가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 지내다가는 미쳐버리겠구나 하는 공포가 들 때도 있다. 그보단 방을 어질러 놓는 편이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방을 어질렀다 치웠다 반복하는 과정이 미쳐가는 길인가 싶기도 하다.

금요일에 계약하기로 한 책이 있다. 돈이 좀 생기면 왼쪽 아래 어금니의 브릿지를 갈아끼울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상담과 치료를 받아볼 것인가 선택해야겠다. 치아도 정신도 부실하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 근데 치과의사가 브릿지 빼고 임플란트 하자고 그래서 치과 가기가 싫다. 암만 전문가라고 해도 남의 잇몸에 이물질을 박아넣는 수술을 너무 쉽게 권유하는 것 아닌가. 비용 문제를 뒤로 하고서 상상만으로 무섭다. 만약 어금니를 선택한다면 브릿지 잘 하는 차과를 수배해봐야겠다.

아 이놈의 불면증. 이런 쓸데 없는 일을 계속 쓰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렇다면 내일 당장 수면유도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줄 의사를 찾아가는 편이 나을까. 한동안 명상이 도움이 되었으나 요즘은 집중하기가 어렵다. 꿈 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다. 꿈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일이 참 좋다. 현실에서 만나는 것보다 평온하다. 대개는 꿈 속에서 이 만남이 꿈이구나 깨닫곤 하는데 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굉장한 안도감이 든다. 현실이 아니니 상대에게 미안해 할 이유도 없어지고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그렇다. 꿈이라서 다행이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