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3일 일요일

한 주 동안의 메모.

1. 시

 소풍을 가야지
 고독한 질주와 아이들의 붉은 눈물을 위해
 진지한 슬픔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을 위해
 가야지

 소풍을 가야지
 절뚝이는 맨발을 끌고
 맨발의 빛나는 상처를 흘리며
 가고 또 가야지

- 조동범 <풀밭 위위 식사> 마지막 두 연


2. 시

푹 삶아지는 게

삶의 전부일지라도,

찬물에 똑바로 정신 가다듬고는

처음 국수틀에서 나올 때처럼 꼿꼿해야 한다.

- 이정록 <국수 -어머니학교 2> 앞부분


3. 글쟁이

두어달전 동네오빠가 술을 먹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글쟁이로 이윤기 선생님을 꼽으면서 "이윤기는 남자 박완서지."라고 말했다. 잠시 멍해졌다. 어떤 위대한 여성에 대해 말할 때 쉽게 그 분야의 거장으로 알려진 남성의 이름을 빌려오기는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에 뒤따른 설명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윤기와 박완서의 문체에 대한 설명과 그 오빠가 두 분의 작품을 접하게 된 경위를 근거로 보자면 정말 이윤기는 남자 박완서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생경하다.


4. 희망

탈핵 강연을 듣고. 알면 알 수록 절망적인 현실이다. 그러나 자포자기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편이 낫지 아니한가? 가장 괴로울 때에도 호기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 농담

동해안이 그 바다가 이 바다인데 해류가 돌아가는 화살표를 보니 그냥 같은 바다. 하지만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해수가 아무리 밀려와도 우리나라 해양수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윤진숙 장관님의 호연지기, 아무 것도 몰라도 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강력한 추진력을 믿으면 된다.


6. 양성애

인간의 본능적 생식을 넘어서는 사랑의 능력을 다양하게 발달시킬 수 있는 계기 중 하나.


7. 2013년에 쓰는 전설

남자가 크게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묻기를 "너 처녀였니?"하기에 여자가 "아니오. 저는 결혼한 몸입니다." 하고 답하였더니 남자는 기뻐하며 제 양물을 단단히 곧추세웠다 하더라.


8. 유혹

정숙한 여자들은 유혹에 저항하는 상황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실은 거부할만한 유혹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9. 재능

평범한 사람들만이 사랑을 안다. 아주 매력적인 사람들은 어떤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다가 곧 재능을 탕진해버린다.

ㅡ 캐서린 햅번의 말, 그녀는 사랑을 알았을까, 아니면 매력을 탕진해 버린 쪽일까?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은 많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다. (김태희의 연기력이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10. 버스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할 때의 순서

엿보고 훔쳐보고 살펴보다 결국 뚫어지게 지켜본 뒤 눈을 감는다.


11. 사발식

예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군대풍의 사발식 같은 걸 좋아했던 과장님이 있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사발식은 싫었고 그래서 그 과장도 꽤나 싫었었다. 그러나 그 사람 아래로 사발을 비웠던 여자 직원이 나 하나 뿐이었기 때문인지 이후로 술자리에 자주 불려 나갔었다. 우리 부서도 아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 나름으로 여직원에게도 사발식을 거행하는 것은 양성평등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일할 때도 그런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고 그 사람이 나를 좋아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내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우리 팀장보다 공개적으로 아쉬워해서 민망했었다. 술을 퍼마시는 것은 남자들의 문화일까? 아니, 역시 이런 것은 알콜중독자의 습성인데 남성 중에 알콜중독자가 많을 뿐이다. 내가 술을 퍼먹는 이유는 술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남성의 문화에 편입되기 원했기 때문일까? ㅡㅡ 글쎄 모르겠지만 지금은 남자보다 술이 더 좋다.


12. 개

개는 빠르게 숨을 쉰다. 개의 가슴팍에 손을 대보면 빠르게 콩닥거린다. 보통 몸집이 작은 동물은 호흡수와 심박수가 빠르다고 한다. 인간의 심박수는 분당 60-80회인데 비해, 작은 쥐는 600회, 커다란 코끼리는 20회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대체로 느리게 숨쉬고 느리게 피를 돌리는 녀석들이 오래 사는 경향이 있다. 그런 근거로 도교의 일부 종파에서는 불로불사를 목적으로 호흡수를 줄이는 수련을 하기도 한다. 나의 개는 빠르게 숨쉬고 바쁘게 피를 돌린다. 이렇게 귀여운 녀석이 나보다 빨리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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