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4일 화요일

헌책방에서 이성에게 매력을 느낄 확률에 대해.

어느 헌책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날은 추웠고 창이 없는 책방 안은 무척 추웠다. 나는 신발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고르고 있었다. 헌책방에서 사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책을 구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 먼지가 날리는 책꽂이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책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이곳에 오게 된 낡은 책 중에는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단 한 권의 책도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추운 날에 빈손으로 돌아서기 아쉬워 몇권의 번역소설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을 때 뜻밖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는 나의 오른팔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내 팔을 꼭 움켜쥐고 있는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두꺼운 외투에 흔적이 남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강하게 내 팔을 움켜쥐었던 이는, 남자라는 사실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남자였다. 그는 그 작은 목소리로 차를 마시자고 말했다. 어차피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을 생각이었기에 흔쾌히 그러겠노라 대답하자 남자는 팔을 놓고 나를 따라 걸었다.

카페에서 그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인근 대학의 대학원생이라 했는데 특별히 흥미가 생기는 학과는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서너살 나이가 많았고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직업군에 어울릴지 짐작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가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는 몇번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아무에게나 쉽게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대화가 멈추면 침묵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 남자가 바람둥이 타입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 여러 번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낯선 여자의 팔을 붙잡고 차를 마시자고 청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남자에게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보겠지요. 라고 정중하게 거절한 뒤 그 헌책방에 반년 이상 발길을 하지 않았다. 딱히 그를 염두해두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헌책방에서 매력을 느낀 이성을 다른 상황에서 다시 만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아주 낡은 것에서 여전히 가치를 찾아내려 하는 공간에서 만난 사람과 추억을 회상하는 이상의 새로운 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책방이라는 공간에서 이성에 대해 호감을 느낄 확률과 치과 진료대기실에서 고통을 기다리는 중에 그럴 확률 중 어느 쪽이 더 높을까? 바닥부터 쌓여있는 책더미를 피해 종종거리며 두서없이 진열된 낡은 책을 이리저리 꺼내어 먼지냄새 배인 종이를 팔랑거리는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끼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순간의 진실이거나 다른 것을 위한 구실일 것이다.

나는 재미 없는 이야기를 흘려 들으며 그 해 여름에 만났던 다른 남자를 생각했다. 그와 나는 끈적하게 더웠던 여름에 신촌의 헌책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낡은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노라고, 그는 특유의 맥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고 나는 달갑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곧 떠나버릴 사람이었고 나는 남겨질 사람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일은 하룻밤의 섹스보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영원한 사랑만큼 공허하지는 않았다.

만약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기다렸다면 그 이유는 그때의 말이 순간의 진실이었는지 다른 것을 위한 구실이었는지 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에게 그렇게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후에 나는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를 만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헌책방의 기억에 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가장 묻고 싶은 점은 남성형 탈모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옛 연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로 최악의 여자는 아니라 다행이다.

홍대와 신촌 사이에 있는 숨어있는 책방에 대해 생각하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서 당시의 기록을 발굴해내 다시 쓴다. 이십대의 전반기, 이성을 만나고 그를 추억하는 일이 정말로 중요했던 호사스러운 시절이었으나, 그때에도 헌책방은 두근거리는 공간이 아니라 차분하게 회상하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헌책방마저 대형서점 체인점이 되어버리고 있지만, 그때의 헌책방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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