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9일 금요일

무작정 여행기 12. 중화의 변방 또는 뎬 문명의 중심.

두 마리의 표범이 돼지를 사냥하는 모양의 서한시대 청동도금 장식


10월 25일 운남성 박물관

투투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은 아침마다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냈다. 나는 푸얼차를 마시면 어쩐지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제하려고 했지만 너무 맛있어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찻상에 둘러앉아 호릅호릅 얌얌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운남 지역의 왕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는 아주 작은 옥새에서 시작했다. 공통시대 이전에 쿤밍 지역에는 뎬이라는 고대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뎬'은 한자로 삼수변에 참진眞자를 쓰는데 컴퓨터로는 입력이 안되는 글자인 듯, 병음은 Dian)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남만정벌은 바로 이 근처의 남쪽 지역에서 3세기 경에 있었던 일이다. 한족의 군대가 진격하기 훨씬 전에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뎬 왕조는 과연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을까? 뎬 왕조의 유물인 작은 옥새가 그 증거라고 하는데 진상조사를 위해 운남성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운남성박물관은 규모 면에서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소수민족 관련 전시품이 많다고 했다. 투투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와 베이시취(북시구)차장으로 가서 84번 버스를 타고 종점 한 정거장 전인 운남성예술극장까지 가면 된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룰루랄라 출발했다.

운남성 날씨는 정말 환상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니 기쁘다. 시리게 푸른 하늘에는 가끔씩 한가로운 구름이 야트막하게 지난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걷노라면 선선한 바람이 휘 불어온다. 가로수 아래를 걷는데도 숲길을 걷는 느낌이 들 정도로 녹음이 우거졌다. 맑고 건조한 공기 덕분에 매운 국물을 먹을 때나 따듯한 차를 마실 때나 상쾌한 기분이다.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도시 홍보 포스터의 카피, 미려춘성 행복곤명, 인정!

운남성 박물관

쿤밍의 가을 하늘은 새파랗다!
운남성박물관(雲南省博物館, 윈난셩보우관)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장하며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전시설명 프로그램이 있다. 입장료는 무료.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들렀던 대부분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입장료로 10~50위엔 정도를 지불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입장료를 냈던 기억이 없었다. 올림픽 끝나고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 대중개방 정책이 생긴 걸까 싶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거의 무료화 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반가운 일이지만 전시시설 입장료를 무료화한다고 딱히 방문자가 많아지지는 않은 것 같다. 운남성박물관에도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박물관 1층은 전시준비 중인 듯 닫혀 있고, 2층부터 상설전시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 있었던 뎬 고대왕국 뎬에 대한 전시였다. 운남에는 한족 국가가 아닌 토착 왕조로 대리국과 남조국이 있었다. 남조(南詔, 난짜오)는 8세기 당(唐)대 이 지역에 있었던 버마족의 나라였고, 대리(大理, 따리)는 10세기 들어 남조국이 멸망한 뒤 이 땅을 차지한 바이족(白族) 의 나라였다. 남조국과 대리국은 한족 국가와 중앙아시아 국가 사이에서 문물의 교류를 담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중화문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조와 대리에 대해서는 꽤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한참 전에 있었던 뎬 왕국의 문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근두근 전시실로 들어갔다.

1955년 Jining의 Shizhaishan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적.

사마천의 사기에 전국시대(정확히는 공통시대 이전 339년) 주나라의 장군 좡챠오(zhuangqiao)가 디엔츠(滇池, dianchi) 호수 근처로 진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윈난의 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고대왕국인 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왕국이 실재는지가 의문이었는데, 1955년 3월에 유적이 발굴되며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장품으로 보이는 청동인물상과 무기, 농기구, 그릇, 옥기와 조개껍데기 등, 1전시실은 고고학적 발굴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뎬 왕조의 도장(모형)이 있었다. 가로세로 약 2cm 정도 크기로, 손잡이의 뱀 같은 인물상을 포함한 높이는 1.5c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금 도장이었다. 이 도장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이야기한 물건이었다. 이 도장이 과연 고대왕국 뎬에서 한자를 썼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진시황의 통일제국 이후에는 한자가 중화의 변방인 운남지역에서도 통용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한 증거는 이 도장 하나 뿐으로 다른 유물에서는 한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작은 유물에는 중화주의에서 비롯한 음모가 숨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 하다. 여기까지 왔다고 해서 진상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금 도장을 지나 왼쪽의 2전시실로 들어서니 뎬국의 다양한 청동병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뎬왕조의 유물 설명에 시대 표기를 서한(西漢 206 BC~AD 25) 또는 전국(戰國, 475~221 BC)이라고 달아놓은 점이 특이했다. 물론 이 왕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한족 왕조를 기준으로 삼아 적어둔 것이겠지만, 이 지역이 한의 세력권이었으리라 연상하도록 하는 장치는 아닌가, 다시 한 번 중화주의의 통합정책에 대한 음모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뎬 왕조와 한자문명과의 연관은 알 수 없었지만 그때의 사람들이 남긴 청동기 유물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낯선 상징물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부장품이었을 청동 종

살벌하게 생긴 으스스한 무기들

전국시대의 청동부장품으로 악기인 것 같다.
뎬 왕조를 상징하는 소 모형이 특이했다.
첨에는 뿔이 강조된 황소인가 싶었는데
이 지역에 사는 물소가 이렇게 생겼다고 한다. 

시자이산에서 출토된 서한시대 청동상, 귀엽다.

우산 든 남자 모습인데 표정이 얼버리.
이 남자와 그가 받쳐든 우산의 주인은
아마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겠지.

춤추는 무희들 모형도 재미있었다.
역동적인 몸놀림이 느껴지는 장식.


춤과 노래는 문명의 가장 유쾌한 부분.
춤은 몸짓으로 남고 노랫소리는 목소리로 남아 있을까.

독특한 문양의 부장품

이 지역 사람들은 태양신을 섬겼을 것이다.
햇살 찬란한 곳이니 당연히 그랬겠지.


그리고 더러운 전쟁광들의 유물도 남아있었다. 유골함을 장식하는 뚜껑에 묘사된 전쟁의 참상과 부장된 각종 무기들이 있었다.


유골함 뚜껑,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역시 참혹한 모습을 묘사한 유골함 뚜껑.


청동제 무기들 중에 특이한 창이 있었다. 세모꼴 창날의 아랫쪽 두 군데에 남자의 모형이 사슬에 걸려 있었다. 벌거 벗겨지고 팔이 뒤로 묶이고 머리는 풀어 헤쳐진 채 고개를 숙인 포로의 모습이었다. 적을 사로잡은 뒤 그 모양을 만들어 무기에 매달아서 무덤까지 가지고 갔던 창의 주인은 얼마나 미친놈이였을까.

청동검과 창날 등의 무기들.

특이한 세모꼴 창날

패배하고 창날 끝에 매달린 사람들

서한대의 청동기 무기 중애는 사슴, 호랑이와 황소, 곰, 표범 등의 동물이 장식된 것도 있었다. 그 중에 뱀 위에 올라탄 두 마리 사슴 도안이 특이했다. 보통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뱀은 지혜의 상징이고, 두 마리가 몸을 꼬고 있을 때는 인류의 시조인 복희여와를 연상할 수도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관이 화려한 사슴은 시베리아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상징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 원래 있던 뱀 부족이 북부에서 내려온 사슴 부족한테 당했던 걸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뱀 위에 올라탄 두 마리 사슴 도안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


그리고 호랑이가 소와 대결하고 또 소를 잡아먹기도 하는 도상도 흥미로웠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분명 어떤 맥락이 있었던 상징이었을 것이다. 표범이 쥐나 소를 잡아먹는 장식도 있었다. 우경을 했던 정주문명과 노마드의 대립을 보여주는 도상일까?


서한대의 뎬왕조 도끼 머리 장식을 보면

호랑이도 있고 물소도 있고


표범이랑 소가 사이 좋게 장난치는 게 아니라

덮쳐서 잡아먹는 도상도 있다. 

표범이 쥐를 잡고

먹고 먹히는 살벌한 묘사가 많았다.

이 짧은 도끼는 평화로와 보이는데

곰 세 마리 쪼르르, 아빠곰 엄마곰 아기곰 같은 장식이 달려 있다.

개구리 모양 청동 창머리
개구리는 다산과 번식의 상징이었을까?
표범과 호랑이 도상은 전국시대 유물까지 이어졌다. 무기만이 아니라 유골함에도 등장하고 청동 탁자에도 등장하는 모티브였다.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다. 이 지역에 흔한 맹수였기 때문에 반복해서 묘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장품의 장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토템이었다고 추정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요기는 표범이 숨어 있네.

무시무시한 징 박힌 몽둥이 머리에는

표범과 소가 뒤엉켜 있다.

짐승들이 우글우글 붙어 있는 유골함

죽은 이는 말을 타고 있고 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

물소 뿔 모양이 멋지다.

여기도 표범과 물소가 뒤엉켜 있고
사이에 송아지가 한 마리 들어가 있다.

정면에서 보면 물소뿔이 장대하게 보이는 모양

물소 꼬리를 물고 있는 표범님 표정이 진지하셔.

생활용구로 넘어가서 청동 화로와 숟가락, 물레, 실잣는 도구, 농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 도기화덕이 맘에 들었다. 실내에서도 한 자 정도 되는 장작을 몇 개 넣고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겠지. 어쩌면 차를 우려내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보기만 해도 훈훈한 모양이다. 도기그릇과 항아리, 베틀추 같은 것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뎬 왕국에는 전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라는 증거니까.

작은 크기로 실내에서 썼을 것 같은 도기 화덕

실 잣는 도구 纺轮及

불쏘시개와 국자 같은 것

청동국자 손잡이에 있는 호랑이와 물소 장식

그런데 청동 국자에도 호랑이가 황소 잡아먹는 피규어가 붙어 있었다. 이 동네에서 삶은 왜 이리 험악했던 걸까. 뭔가 싶어 나중에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사장님께 물어보니 이족의 상징이 호랑이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소수민족 신화를 찾아보니 대략의 답이 나왔다. 이족(彝族)은 호랑이를 숭배하는 민족이었는데 약 3세기 이전에는 이들이 운남 지역의 주류였다. 그러다 태족(傣族)의 세력에 밀려났는데 표범은 태족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야한 장식조각. 그림을 클릭하면 커져요.

옻칠을 한 매발톱 모양 목제 장식 漆木鷹爪形木祖


전쟁이 아니라 생활을 묘사한 서한시대 유골함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뭘 하는 걸까 궁금했다. 중앙의 둥근 기둥은 탑 같이 생겼는데 종교적인 상징물일까? 가마 타고 가는 사람, 말 타고 가는 사람, 짐 지고 가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일상생활을 묘사한 모형이 재미있었다.

일상생활을 묘사한 유골함


한쪽에 거대한 청동 기마인물상이 보여 달려갔다. 이렇게 거대한 동상이 출토됐다니 뎬 왕조 멋지네! 감탄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나서 설명을 보니까 그저 최근에 당대의 무사 모습을 상상해서 만들어둔 모형이란다. 말안장과 마구는 갖추었는데 신발은 신지 않는 무사, 이런 이미지라고 상상했구나.

뎬 왕조의 무사를 상상하면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운남성 지역은 서아시아와 남부 아시아가 만나는 지역이라 뎬 왕조도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을 것이라고 한다. 금과 옥, 마노 등의 귀금속 장신구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장신구에는 공작새가 주요 모티브로 나타났는데 태족의 상징물이라고 한다.


청동북 모양으로 만든 마노 구슬

소머리 모양의 홍옥수 구슬

옥으로 만든 환

터키옥(녹송석 绿松石) 목걸이

자개 목걸이
우산 같은 것을 들고 있었을 여자 상
얼굴이 확실히 한족은 아니고 동남아 느낌이다.
태족은 태국 사람들과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 민족인 듯.

공작새 모양과 태양을 상징하는 원 문양이 장식된 청동거울
공작과 태양은 태족의 상징.

부장품 집 모형을 보니 건축물이 특이하다.
지붕 위로 겹쳐올린 서까래를 길이 맞춰 다듬지 않고
그냥 위로 쭉쭉 올려놓았다.

사람과 소 도안이 계속된다.

네 명의 사람과 소, 일곱 마리의 소, 오방의 소.
서한과 동한(AD 25~220)의 물소 모양 허리띠 장식.

물소 세 마리 머리가 겹쳐져 있고

물소뿔 모양의 장식

물소는 엄청 사랑받은 짐승이었던 모양이다.

2전시장을 돌아나와 맞은편으로 가면 3전시실, 여기도 뎬 왕조의 생활 면면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대의 동전이 여기서도 출토되었다고 하니 교역이 활발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한자가 통용되었을 거라고 믿어도 될까?

동한(AD 25~220) 대의 동전인 오수전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묘기하듯 불을 밝히는 사람 모양의 등잔
뎬 왕조의 청동기 유물들은 한대의 청동기와도 유사하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아마 전세계 공통이지 싶다. 몇몇 특이한 도상을 제외한 일상용품, 그릇, 항아리, 화로, 동검 따위는 한족의 것과 차이를 모르겠다. 특히 옥으로 만든 수의는 이것은 정말 한족문화라 생각했던 건데, 운남 티벳 서아시아 지역에도 비슷한 유물이 있었을까? 나중에 찾아봐야지 했는데 돌아와서 찾아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청동 그릇과 화로 등

납작한 옥 조각을 연결해서 수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3전시실은 뎬 왕조의 청동기 문화와 생활상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되었다. 청동유물을 확대해서 제작한 모형들도 전시되어 있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뎬의 남자들는 둥글게 조개 모양으로 상투를 꼬아 틀어올렸고, 여자들은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묶어서 늘어뜨렸다는 식의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잘 이해하지 못해서 아쉽다.

당시에는 이런 디자인의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물건을 살펴보는 일은 재미있는 과정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것이 전부일까 하는 의심이 든다. 일테면 뎬 왕조의 청동북(징과는 다르게 땅에 내려놓고 치는 형태) 유물이 많았지만, 이들이 오직 청동으로 만든 북만 두드리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나무테에 짐승가죽을 씌운 북을 만들어 썼을 테지만 2천 년의 시간이 지나며 부패해 사라졌을 것이다. 남아있은 것은 극히 일부,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겠지.

밀불교의 탱화
3층은 소수민족의 공예품 전시실이었다. 알록달록 현란한 문양이 들어간 의류와 장신구들, 섬세한 자수와 장식이 아름다웠다. 이곳에 전시된 공예품은 오래된 유물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들을 소개하는 식이었다. 종이공예, 도기와 자기들, 목공예품, 민속화, 밀불교의 탱화, 가면 등등. 엄청 긴 두루마리 그림, 지옥부터 부처님한테 가는 길을 묘사한 그림도 있었다. 귀금속 장신구부터 생활용구까지 소수민족의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한족에 비하면 지극히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의 문화가 운남성 박물관의 주요한 볼거리.

신에게로 가는 길, 신로도 두루마리 그림.

소수민족의 가면 공예품

박물관의 뮤지엄샵에서 이런저런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자수장식이 들어간 작은 지갑이나 주머니들이 28-48위엔, 티셔츠 68위엔, 염색손수건 26위엔, 머플러 180위엔, 귀걸이 98-138위엔 정도. 선물로 살까 생각했는데 짐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다. 이후에 관광지가 된 소수민족 마을 인근에서 비슷한 제품을 많이 보았고 가격도 박물관보다 약간 저렴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쿤밍에서 귀국하는 일정이라면 공예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박물관에 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귀여운 -_- 파충류
박물관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통청강에서 거대한 파충류를 보았다. 이구아나 같이 생겼다. 이름을 들었는데 금방 까먹고 말았다. 혀를 낼롬낼롬하고 눈을 껌뻑껌뻑하는 모습이 은근 귀여워서 등을 만져보았다. 파충류는 차가울 줄 알았는데 체온이 따끈해서 놀랐고 거친 감촉이 낯설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박물관에서 본 뎬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했다. 이 지역의 역사와 소수민족, 한족문화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복잡하게 느껴졌다. 운남 지역은 이미 원나라 때 쿠빌라이 칸이 직접 와서 쓸어담은 지역이니, 오래 전에 중국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티벳과 같은 영토분쟁의 소지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족문화와의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조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금으로 만든 작은 인장과 한무제 대의 동전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이외의 유물에는 전혀 한자 기록이 없었다. 청동기 유골함에 망자에 대한 기록도 없고 검이나 무기 등에 새겨진 명문도 없었다. 고고학 발굴의 진위여부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까닭은 음모론을 즐겨서가 아니라 중국의 일부 사학자들이 고대왕국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출토품을 보았지만 아무래도 기묘한 느낌이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뎬의 청동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출토된 유물들이 이 지역을 뎬 문명의 중심으로 볼 것인지 중화문명의 변방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된 작은 쇳조각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인식이나 국가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유물들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게스트하우스 베란다에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반달을 바라보면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