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작이 그랬다. 오후 세 시에 약속을 잡아 놓았다. 한 시간 동안 다른 일을 처리하고 나가면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협조문서를 이메일 전송하는 과정에서 일이 조금 늦어졌고 그 결과 커피를 못마신 채 허둥대며 달리다가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탔다. 지하철을 다시 갈아타고 경로를 수정한 뒤 시간을 확인하니 두 시 반, 아무래도 약속시간에 늦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 거래하는 출판사에 계약서 쓰러 가는데 지각이라니, 그냥 구두계약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전화해서 무엇이든 변명거리를 대고 못 간다고 말하고 싶은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시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내 입장에서 이왕 늦어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지나간 잘못들 자책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저쪽 편집자 측에서도 작가가 삼십분 쯤 늦게 도착하는 편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 것보단 나을 거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완벽한 인간인 척 할 필요 없어. 그건 사실이 아니고 위장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자위해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서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울렸다.
삼십 분 늦게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기다려준 사람들의 반응은 멀리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정도였다. 아무도 화내지 않았고 책망하지 않았다. 장난 섞인 핀잔도 듣지 않았다. 반대로 환영을 받았고 앞으로의 거래도 잘 해보자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글쎄,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는데 삼십 분 정도 늦었다고 해서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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