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7일 토요일

장정일의 타자기와 보트 하우스.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 중 하나는 어떻게 일을 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선배들의 조언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그런 조언은 다양한 문학 장르에 걸쳐서 찾아볼 수 있다. 에세이도 있고 소설이나 시도 있으며 희곡이나 시나리오 속에서도 주인공인 작가(또는 문학청년)의 진지한 고뇌가 드러나는 작품이 셀 수 없이 많다.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으로 좋은 타자기를 고르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풍부하게 가능하다. 당장 떠오르는 책이 두 권 폴오스터의 빵굽는 타자기나 타자기를 치켜세움 같은 에세이가 있다. 그리고 장정일의 소설이 그렇다.

물론 작가가 아닌 다른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선호가 있을 것이다. 주방장이 좋은 칼을 고르는 기준이라든가 전기설비업자가 드라이버를 가장 좋은 상태로 손질하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미궁 속을 헤매고 다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에 대한 작가의 글은 타자기의 활용여부와 무관하게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는 단 한 번도 타자기로 글을 써 본 적이 없지만 열아홉살에 타자기를 가지고 싶었던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읽으며 타자기의 가치를 의심했던 적이 없다.

나는 지금 방황 중이다. 보석 허가를 받고 구치소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낭떠러지에 섰던 것이다. 다음엔 어디로 내딛을 것인가. 클로버 727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 앞의 낯선 여자는 나의 의도를 과장해서 헤아려준다.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 나는 그런 글을 썼었는지도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컴퓨터를 좀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치기가 느껴져 낯이 뜨거운 대목이다. '흠. 내가 쓰거나 내뱉은 말은 모조리 나를 진창에 빠뜨리는 똥물이 되는 군. 이게 글쟁이의 운명이야.' (p.44)

이제 나는 안다. 해변가에서 반바지와 소매 없는 티셔츠를 입은 채 파라솔 아래 펴놓은 긴 비치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얼음 재운 콜라를 마시는 순수한 날이 내개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 글들을 쓰게 하는 것은 내 적의라는 것을. 내 적의가 평생 나를 끌고 다니며 소설 나부랭이를 쓰게 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하여 저 발칙한 여인, 변덕 많고 질투심 많은, 애살스러운 애인이 나를 유혹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 잠복해 있는 적의의 도끼가, 무거운 자물쇠로 굳게 잠긴 보트 하우스의 문에 생채기를 내고 그 문을 거칠게 부서뜨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pp.222-223)

장정일, 보트하우스, 김영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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