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4일 목요일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말하는 법.
사당역에서 수원 영통지구를 거쳐 아주대와 경희대로 가는 7000번 버스에 탔다. 출입구에 가까운 오른편 맨 앞자리 창가 쪽 좌석이 비어 있었다. 복도 쪽 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무릎을 스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의 옆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내 좌석 쪽에 걸쳐져 있던 그의 재킷 끝단을 엉덩이로 깔고 앉고 말았다. 남자는 몸을 일으키며 조심스레 자기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진남색 모직 재킷과 진회색 바지를 입고 검정 구두를 신은 남자의 머리카락은 거의 하얗게 세어 있었다.
남자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나도 가방을 무릎 위에 얹고 책을 꺼냈다. 남자가 펼친 책은 판본을 보니 민음사의 세계문학 전집 중 하나였다. 내 책은 피에르 바야르가 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었다. 그의 전작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런 후속작이 나왔는 줄 모르고 있다가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되어 주문한 책이었다.
봄볕이 따갑게 얼굴로 들이쳤다. 버스의 회색 주름 커튼을 잡아당겨 창문을 가렸다. 그리고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빛이 적어져서 책을 읽기 불편하면 어쩌나 싶었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책장을 넘겼다. 나도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에르 바야르는 재미있었다. 가까이 읽기 위해 팔을 당기며 왼 다리를 오른 다리 위로 꼬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도 같은 방향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을 보았다. 굽은 길을 지날 때는 차가 좌우로 흔들렸다. 남자와 나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어깨를 기대면서 책을 읽었다.
버스가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버스가 터널을 통과할 때는 차 안이 어두워져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는 책에서 눈을 떼고 물끄러미 터널 끝을 바라보았다. 나도 왼손을 책갈피에 끼우고 고개를 들었다. 곁눈으로 남자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을 확인했다. 토마스 만의 <브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1권이었다.
동수원 톨게이트를 지나기 전에 남자는 책을 덮었고 가방 안에 집어 넣고는 눈을 감았다. 그는 지친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네이비색 재킷에 흰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털어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짧은 잠을 방해하고 싶디 않았다. 그의 숨소리는 늙었지만 낡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었다.
이 버스가 끝 없이 몇 시간을 계속 내달린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각자의 손에 든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 읽은 책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나란히 버스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와 나를 우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공감을 느꼈다.
그는 어땠을지 모른다. 그의 짧은 잠은 깊어졌고 코를 코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책을 읽었던 시간은 영원처럼 길어졌다. 이런 느낌에 취해 내려야 할 버스 정거장을 놓쳤다. 한참을 지난 뒤에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네이비색 재킷 칼라에 흩어진 비듬 자국을 바라보다 웃었다. 이렇게 작고 작은 삶의 조각을 눈으로 보았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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