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22일 금요일

알.

가타리가 쓴 글을 읽다 보면 가끔 프로이트 사기꾼, 라깡 거짓말쟁이,를 외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혼자 있을 때는 충동을 따른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텅 빈 공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좋겠다. 그것을 결핍이라고 규정하고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결여, 향유(jouissance), 승화(sublimation)는 결코 이정표가 될 수 없는 말들이다. 상상계와 상징계를 가로지르는 무의식의 늪지는 너무나 어둡고 질퍽거려서, 우리들은 지쳐 쓰러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 고립되고 만다.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결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빈 구멍에 먼지와 거품과 돌조각을 채워넣기 위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환상속에서 보내야만 한단 말인가? 우리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로, 과거로, 과거로, 고통스러운 퇴행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과연 '인간(L'homme)은 알 껍질이 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 오믈렛(L'hommelette)'일까? 하지만 인간을 알에 비유하기 전에 먼저 힘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알을 밖에서 깨뜨리면 오믈렛이 되지만, 안에서 깨면 생명이 시작된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해서 쉽게 상처입고 부서진다. 사실이다. 그러나 알의 한계를 인정한다고 해서 맨몸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고정관념을 깰 수 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으며, 고른판 위에서 상상하고 교감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법을, 가타리를 읽으면서 깨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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