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택시 기사들이 달려와 호객을 시작한다.
"너 어디로 가니?" "베이징 가니?" "텐진역 가니?"
여기저기서 막 달려들어 물어본다. 근데 나 어디로 가지? 내가 묻고 싶다.
천진항 택시기사님들, 제가 아무 대답 않고 막 무시하고 지나간 이유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믿어주세요.
대강 가보고 싶은 도시들은 있었다. 당나라의 수도였던 시안, 팬더가 사는 청두, 아름다운 춘성 쿤밍, 지도를 보고 기차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니까 어딘가 기차역에 가서 표를 사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예약은 안 했지만.
기차역에서 내 뜻대로 기차표 예매가 안 되면, 그때 가서 고민하지 뭐. 항구 바로 앞 터미널에 관광버스가 열 대 정도 서있었다. 버스 문 열어놓고 해바라기씨 까먹으면서 한담을 즐기는 아저씨들이 있길래 달려가서 길을 물어봤다.
"어떤 버스가 기차역 가요?"
내 질문에 한 아저씨가 "무슨 기차역?" 이라고 반문하는 순간, 다른 아저씨가 말을 자르고 끼어든다.
"너 일본인이니?"
"아니에요." 힘차게 부정한 뒤에 "한국인입니다!" 라고 외쳤다.
나의 국적을 의심했던 아저씨는 한궈런(한국인)이라고 중얼거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댜오위다오(일본말론 센카쿠 열도)의 영토분쟁으로 중국 내에서 반일감정이 심해지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나오고 있었다. 일본계 상점에 돌을 던지고 일장기를 불태우는 영상도 보았다. 그래서 나는 "댜오위다오는 듕국영토입니다."라는 내용을 미리 작문해서 연습하기도 했다. 자, 그러니 어서 영토분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주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기를 따라오란다.
아저씨를 따라 가건물로 들어가니 중국인 무역상인들이 모여있다. 짙은 화장이 인상적인 왕언니 느낌의 여자와 왜소하지만 다부진 인상이 참치를 닮은 젊은 여자, 지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아저씨 둘이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나는 시안으로 가고 싶다고,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왕언니 말씀에 따르면 지금 바로 북경에 가도 9시 전에 도착은 어렵다며, 일단 가까운 기차역에 가서 기차표부터 구하란다. 텐진역에서 시안으로 가는 표를 구할 수 있으면 좋고, 만약 표가 없으면 베이징남역으로 이동해서 야간기차를 알아보라고 했다. 다부진 참치 여자가 펜을 들고 메모지에 가장 가까운 기차역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귀엽게 택시를 그리고서 친절하게 내가 가야 할 곳들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우왕 쎼쎄~!
탕구훠처짠(항구기차역)까지 택시기사가 50위안을 부르길래 반사적으로 비싸다고 했더니 흥정을 시작한다. 중국어가 조금 늘어도 절대 나아지지 않는 게 흥정의 스킬이다. 그리고 여기서 기차역이 얼마나 되는지 거리도 모른다. 일단 지나쳐서 다른 택시기사에게 30위안에 가자고 했더니 그러잔다. 이렇게 단번에 흥정이 성사되어버리면 내 요구가 받아들여졌음에도 찝찝한 이유는 뭔가...
미터기를 켜지 않는 택시에는 이미 할머니가 한 분 타고 계셨다. 내가 합승하게 되어서 할머니가 가려던 길에서 돌아가게 되었는지 기사한테 뭐라고 따지다가 갑자기 나한테 "조선사람이에요?" 물으시더라. 그렇다 대답하니 반색하며 반가워한다. 삼년전에 한국 국적을 취득한 뒤 중국에 처음 방문한 거라고 하신다. 경상도 김천이 고향이라 고향에서 죽을 작정이라고, 지금은 아들 내외와 같이 경기도 광주에서 살고 있고, 잠시 중국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왔다고, 어쩐지 쓸쓸한 이야기.
기차역에 도착하니 오후 4시 반 쯤. 기차표 예매는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일 새벽 기차는 자리가 없고 그나마 다행히 다음날 오후 기차가 있었다. 시안에서 청두, 청두에서 쿤밍까지도 예매하고 싶었지만, 뒤에 줄이 너무 길게 서 있어서 그만 밀려났다.
그리고 기차역 밖으로 나와서 깨달았다. 내가 있는 곳이 텐진역이 아니라 텐진항구 근처의 작은 기차역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여기서 텐진역으로 가는 차표도 사야 하는데... 다시 돌아가서 줄 서기가 싫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아야지.
버스를 타자. 기차역 밖으로 나가서 버스정류장을 찾는데 110번 버스만 잔뜩 서 있다. 그 중에 정차해서 청소하고 있는 버스 문이 열렸길래 기사님께 물어보니까 앞으로 200미터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고 621번을 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준 뒤에, 묻는다.
"너 일본인?"
"아니, 나는 한국인입니다."
이번엔 댜오위다오는 중국땅이다, 라고 먼저 외쳐볼까 하다 참았다.
역에서 약 50미터 지나 있는 버스정류장을 하나 지나치고 나니 인도가 끊어졌다. 오른쪽은 철로가 지나가서 아무 것도 없다. 갓길을 따라 좀 더 걷다보니 정류장이 보였다. 근데 여기 621번은 안 써있다. 퇴근하는 직딩 아저씨를 붙잡고 또 길을 물었다. 저 기차역 가려는데요...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언어는 공기 같은 것이라 이전에 배웠던 말이나 내 입으로 말했었던 단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는 것 같다.
마침 달려온 버스 621번은 시외곽과 중심부를 연결하는, 서울로 치면 빨간버스 같았다. 뒷문이 없는 좌석버스로 인적이 드문 대로로 한참 내달리고 정차하는 정류장도 많지 않았다. 요금도 일반 시내버스(1~2위엔)보다 비싸서 6위엔. 근데 잔돈이 없어서 10위엔 내고 거스름돈 못 받았다. 중국 버스는 거스름돈 안 돌려준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4위안이 아깝다는 느낌과 예전엔 알고 있었던 걸 준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맘이 상했다. 언제나 이렇게 사소한 데 맘이 상하지.
텐진역까지 가는 데 한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항구에서 도심까지 거리가 꽤나 멀구나. 게다가 퇴근시간의 교통체증까지 있었다. 배에서 바로 내려서 오늘 중에 시안으로 이동하겠다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깨달았다.
텐진기차역은 규모가 크고 창구가 많이 열려 있어서 사람이 많아도 그리 붐비지 않았다. 시안에서 청두로 가는 K5 티켓과(195위안, 잉워 상) 다시 서안에서 쿤밍으로 가는 K673 티켓을 예매했다. (374위안, 롼워 상) 다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예약할 때는 5위안 씩 수수료가 붙는다. 이 사실도 영수증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중국여행을 예닐곱번은 했는데 참 쉽게 잘 잊는구나.
기차표 예매를 마쳤으니 이제 오늘 밤 잘 곳을 찾아봐야지. 그리고 중국 USIM 카드를 구입해야겠다. 옌통에서 3G서비스를 한다고 했어.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었지. 쿤밍의 지인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 근데 왜 텐진의 밤거리를 무작정 걸었을까?
텐진은 중국사에서 중요한 위치였던 적이 없는 늪지의 항구 도시, 19세기에 제국주의 국가의 압력으로 개항한 뒤 상하이와 함께 외국문물과 중국문물이 교차하는 경계가 되었다. 서구화의 진통을 심하게 겪은 도시이기도 한데, 프랑스 수녀들이 민중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고 의화단 항쟁 때 기독교 예배당이 불타기도 했다. 지금 텐진은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고 4대 직할시 중 하나.
텐진시내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다.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된 고층건물과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 이 도시는 낮보다 밤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기차역 맞은편으로 서양 조계지가 남아있었고 건물마다 외벽에 호화롭게 조명을 밝혀 전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도시의 미관이란 소모적인 것, 아침이 되면 비참한 뼈대가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도시에선 밤길을 걸어야 한다.
한시간쯤 걷다가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은행 ATM 간판이 보이길래 환율이 더 오르기 전에 현금을 더 찾아둬야겠단 생각이 들어 들어갔다. 근데 인출이 안 된다. 통신연결에 실패했다는 메시지와 오류코드 ***01. 이게 뭔가 싶었는데 로밍해둔 전화로 뾰로롱 문자가 온다.
KB국민카드
이동현님
10/17 20:16
해외이용거절:SAVINGS ACCOUNT승인 거래불가
음... 이렇게 말로만 듣던 국제미아가 되는 건가? 지금 가진 돈으로는 리턴티켓도 사지 못할 것이다. ATM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뒷사람이 기다리길래 돌아섰다. 뒤에 서있던 남자가 고장났냐고 물어보아서 내 카드가 안된다고 답했다. 대답을 듣고 어눌한 발음을 눈치챈 남자가 다시 불쑥 묻는다.
"너 일본인?"
"아니, 한국인입니다."
남자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ATM으로 제 볼일을 본다. 기분도 꿀꿀한데 남자의 등짝에 대고 댜오위다오는 중국땅이라고 얘기해 버릴까보다.
역 근처를 멍하니 걷고 있는데 호객업에 종사하는(aka 삐끼) 아주머니가 따라온다. 숙소 구하냐는 질문을 듣고 오늘 잘 곳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 어디서든 잠을 자긴 자야지. 일단 따라오는 호객업자에게 팅부동(못알아들어요)을 외치고 걸었다. 역 근처에는 여관 간판이 여러 개 보였다. 그 중 하나 용문여관에 들어가보니 싱글룸 90위엔, 나쁘지 않은 가격이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여기선 외국인 주숙등기가 안 된다며 건너편 쥬디엔으로 가란다.
보통 쥬디엔(주점)은 여관이나 빈관보다 비싼 숙소. 밖으로 나갔더니 아까의 호객업자가 내 팔을 붙잡고는 쥬디엔으로 가잔다. 자포자기한 기분이 되어 아줌마를 따라갔다. 바로 맞은편 간판은 나도 읽을 수 있다고 뿌리칠 기운이 나지 않았다. 밍지아콰이지에쥬디엔(명가쾌첩주점)의 숙박비는 160위엔에 디파짓 40위엔. 조금이라도 깎을 수 있지 않을까 흥정을 시도해봐도 실패. 카드키를 받아들고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호객업으로 버는 수수료가 얼마쯤 되는지 궁금해졌다.
숙박비는 160위엔 / 디파짓 40위엔
침대 매트는 딱딱하지만 시트는 깨끗하고 뜨거운 물도 잘 나옴.
미니바 비슷하게 비치된 물품도 인근 상점에서 파는 가격과 동일했다.
(냉장고는 없지만, 컵라면, 생수, 청량음료, 양말과 속옷 등)
텐진역 근처에서 하룻밤을 잘 일이 또 생긴다면 다시 올 것 같다.
시내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다른 선택지도 없다.
-- 실질적 여행정보 를꼼꼼하게 전해주고 싶었어...
대충 짐을 풀고 나가서 길거리 공용전화를 찾아 쿤밍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략 23일에 도착할 거라고 알리고 그때까지 쿤밍에 있을 건지 물어보니 웃으며 그러겠다고해서 굉장히 안심이 되었다. 전화 상태가 안좋아서 일단 끊고 다시 걸어보려 했지만 이번엔 불통이었다. 공용전화라는 게 우리나라 같은 공중전화가 아니라 잡화를 파는 상점에서 일반전화기 몇 대를 내놓고 장사를 하는 것, 사용요금은 비싸고 통화품질은 저렴하다. 내일 아침에는 일어나자 마자 옌통에 가서 핸폰을 개통해야지. 텐진역을 거닐며 와이파이 잡히는 데 없나 찾다가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그 자체가 비효율적인 시간낭비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니까, 헤매고 묻고 어리석은 일을 하고,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그리고 어쩌면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여행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일은 덜 바보같이 굴겠지. 글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저녁밥을 먹기 귀찮아서 숙소 옆 가게에서 건포도와 녹차와 생수를 사들고 왔다. 포트에 물을 끓여 차를 우리고 건포도와 건블루베리로 얌차. 이 건포도는 중국의 서부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재배해서 남부 광주에서 가공한 제품, 건조 블루베리는 미국산으로 한국에서 사가지고 온 것. 말린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세계화 만세 외쳐야 하나.
심심해서 텔레비전 뉴스를 틀어놨는데, 오늘 오후에 한국해경과 중국어민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는 소식이 나온다. 자막으로 써주지 않는 내용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아마도 흑산도 인근에서 조업하던 중국어민들을 해경이 체포한 모양이다. 뉴스 진행자가 최근 한국해경이 중국어민을 나포한 사건을 몇 가지 열거하고, 해경에게 맞아서 몸에 피멍이 들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중국인들의 모습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준다.
내일부터는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면 한국인이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안전할까?
"댜오위다오는 중국땅"이라고 믿는 한국인이라고...ㅎ ㅎ
답글삭제꽤 많은 사람들이 국적을 궁금해했지만, 반일감정의 원인이 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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